[을지로 3가] 산수갑산-한식의 두 갈래 ‘멘탈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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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잘 삶고 잘 채울 수 있을까. 산수갑산의 순대나 부속을 먹으면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단순히 날것의 상태를 벗어나는데 그치는 조리가 아니라(그런 수육, 부속 꽤 많다), 분해를 통해 재료의 단점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한 음식이다. 돼지가 분해 후 재조립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각 부위별로 최적의 구간에 머무르기란 어려운 일. 토렴의 덕을 어느 정도 입었으리라 짐작하지만, 심지어 통상적인 경우보다 두 배는 두툼하게 썬 간마저 습관적으로 ‘퍽퍽하다’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다.

그런데 왜 소금간이 안 되어 있을까. 차원이 조금 다른 조리 과정을 거치는 순대를 제외한다면, 삶아서 익힌 모든 고기 및 부속에서는 소금간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다. 기가 막히게 잘 삶고 속도 채운다. 먹으면서 보고 있노라면, 서양 주방에서 효율성을 표현하는 ‘well-oiled machine’이라는 표현이 그네들이 쓰는 인원의 극히 일부만으로도 딱 들어맞는다. 주문이 많아도 절대 서두르는 것 같아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게 적절한 속도로 나가는 상황 말이다. 조리의 이해나 숙련도 등, 빼어는 완성도를 위한 모든 조건을 갖췄다. 그렇다면 소금간을 못 맞출리가 없다. 실제로 순대의 속은 간이 기름진 음식-굳이 비유하자면 소시지 등-에 맞게 적극적으로 잘 되어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궁금해진다. 못할 것 같지 않은데 왜 안하는 걸까. 물론 수육에 간을 하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대개 주재료의 간이 0인 상태에서 간장이나 새우젓처럼 100의 간을 지닌 양념에 찍어 먹는다. 나는 이걸 여태까지, 긍정적으로 표현해서 신중을 기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물론 그 정도로 기술이 딸리면 안되지만, 그날그날 바뀔 수도 있는 재료의 수급량에 맞춰 소금을 조절하기가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산수갑산의 경우는 그렇게 볼 수도 없다. 그래서 이것을 그냥 한식의 ‘멘탈리티’ 문제라고 본다. 간을 적극적으로 맞춰주는 보조 요소가 있기 때문에 식탁에서 맞춰 먹어도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국이나 탕류에 간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다. 그리고 반찬과 더불어 ‘먹는 이가 맛을 조절할 수 있는 식문화’라고 긍정적으로 여긴다.

IMG_8401과연 그럴까. 다른 글에서 나눠서 다룬 적이 있으므로, 여기에선 단순한 소금의 역할만 짚고 넘어가자. 이런 종류의 조리에서 필요한 소금이란 적극적으로 간을 맞춰주는 요소가 아니라 재료의 맛을 끌어내어 밋밋해지는 걸 막아주는 역할이다. ‘재료+소금+열=새로운 맛’인 것. 따라서 조리 전/후에 간을 맞춘 음식의 맛은 다르다. 양념에 간을 100% 기대면 일부에만 액센트를 주는 짠맛을 전체의 간이 맞는 것으로 착각하는데다가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짠맛을 많이 느끼게 된다. ‘염분 많이 섭취하면 고혈압’ 카드를 쓰려는 게 아니라, 맛만 놓고 보아도 균형이 사실은 깨진 상태라는 말이다. 얼마 전 올린 에서 지적하려던 것처럼, 0와 100의 양 점을 맞추기 위한 조미료와 맛이 소금과 짠맛이 아닐텐데, 그렇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산수갑산의 수육이나 돼지부속은 소금을 안 쓴 것치고 더 이상 맛있을 수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뒷맛이 평평하게 떨어진다. 아무래도 지방+소금의 황금조합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에 단맛이 주도권 쥔 한국의 식탁에서는, 아예 간이 안 된 상태(0)과 지나치게 짜다고 느끼는 상태(100) 사이의 구간을 찾는데 어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주방에서 간을 제대로 맞춘 음식에 대한 개념을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또 다른 갈래의 멘탈리티는 이런 음식을 향한 인식과 고객층에 대한 것이다. ‘서민-소박함’의 멘탈리티 말이다. 순대가 서민 음식인가. 그럴 수 있다. 공장에서 만든 당면 순대라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순대는 서민 음식이라 절대 볼 수가 없다. 직접 속을, 그것도 잘 채운 순대는 귀한 음식이다. 김밥이나 만두와는 또 다른 차원에 속해서, 예전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공장에서 만든 재료를 매장에서 조립 및 완성만 하는 정도로 “수제” 딱지를 씌워 비싸게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흐물거리는 창자에 재료를 고르게 채우려면, 기술 만큼이나 끈기도 중요하다. 요즘 널린 자칭 “윈도우 베이커리”의 못생기고 덜 익은 빵과 달리, 일정 수준의 숙련도를 쌓지 않으면 손님 앞에 내놓을 얼개조차 갖추기 힘들다.

하지만 이런 음식이 그만큼의 귀한 대접을 받는가. 가격은 물론이거니와, 고객층도 그렇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순댓국이 6,000원, 사진의 모듬 순대 한 접시가 14,000원이다. 완성도에 합당한 가격이 아니다. 싸도 너무 싸다. 찾아오는 손님은 어떤가. 시끄럽다든가 무질서하다든가 그런 건 신경쓰지 않을 수 있다. 입지의 한계도 있고, 좋은 음식을 위해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손에든 담뱃불을 끄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어깨로 쳐 가면서 좁은 입구를 잔뜩 가로 막고 하대하듯 일하는 아주머니를 대하는 6-70대 노인 무리를 겪고 있노라면, 그들은 알고 있는가 궁금해진다. 젊은 시절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이 음식이 그렇게 대수롭지도 만만하지도 않다는 것을. 아니, 오히려 귀하다는 것을. 일전에 화곡동에서 해장국을 먹고 ‘서민의 적은 서민’이라는 말을 했다. 그 해장국은 산수갑산에 비하면 수준이 한참 떨어진다. 한식에서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면 바로 이런 음식이 품고 있을텐데, 플라스틱 뚝배기에 싼 가격, 매너라고는 모르는 손님이 팔자다. 너무 가혹한 건 아닌가. 요즘 많이들 들먹이는 ‘젠트리피케이션’의 마수에 휘둘리지 않고 이런 음식을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제값을 주고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그런 미래가 올까?

2 Responses

  1. Simone Kim says:

    가게 사고났다고 해서 많이 놀랐었는데 다행히 별일 없었나보네요.
    전통아바이순대랑 산수갑산이 있는 을지로는 그야말로 순대의 성지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