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동] 라멘 베라보-계란과 죽순, 입지
오독에는 패턴이 존재한다. 그걸 읽는 건 안타깝지만 또 나름의 재미가 있다. 2차 창작의 영역에 속하는 건 아닌가 생각마저 든다. 무타히로의 계란에 대한 언급이 그렇다. 계란의 존재나 선택 여부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다. 계보에 충실하려는 시도든, 셰프가 자의적으로 판단하든 어울리지 않아서 아예 만들지도 않는다거나, 선택으로 설정하는 건 이해하고 또 존중할 사안이다. 그것이 문제라고 한 적 없다. ‘모든 라멘에는 계란이 들어가야 되는데 왜 없나 빼애액’ 같은 말은 한 적도 없다는 말이다. 주문할 때 듣지 못했으므로 결정 자체에 대해서 물었을 뿐이다. ‘만들다가 손님이 와서 못 만들었다’는 대답을 들었고, 그 무신경함이 싫었을 뿐이다. 그렇게 캐주얼하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부재는 매장의 인상을 좌우할 수 있다. 사과를 들은 기억도, 열심히 더듬어 보았지만 없다. 또한 ‘정성’이라는 단어는 입에 담지도 않았다. 정성은 필요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기술이나 숙련도와 혼동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둘은 다르다. 어쨌든, 오독이 즐겁다면 오독오독 열심히들 하시라. 그 세계에서 ‘준엄’하고 또 ‘거만’하게 존재하는 나를 증오하는 재미를 느껴 보시라. 그 재미, 나도 알고 있다. 박탈하고 싶은 이유가 없다. 그는 정확히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쨌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계란이다. 가장 추운 날 저녁에 망원동의 라멘 베라보에 찾아 갔는데, 그때도 계란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했다. 맛을 들이지 않은 것은 의도일까.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맛계란을 만드는 과정은 전체 라면의 요소를 감안할때 너무나도 힘들어서 의도적으로 건너 뛰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맛을 들이는 과정 자체보다, 계란을 일본식-아니면 비 한국식-으로 잘 삶고, 흰자에 흠을 입히지 않으면서 껍질을 벗기는 그 이전 단계가 더 신경 쓰인다. 거기까지 잘 했는데 재우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의도적인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맛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남는다. 지방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국물이 아니더라도 일본식 라멘 국물에는 짠맛과 감칠맛이 적극적으로 배어 있다. 한편 계란, 특히 흰자의 맛은 뭉툭하고 밋밋하다. 집에서 삶은 계란에 소금을 찍어 먹는 것과, 미리 간을 한 감동란의 맛은 어떻게 다른가. 풀어 소금간을 해 익히는 오믈렛은 또 어떤가. 한편 계란샐러드에서 마요네즈가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맛의 표정을 떠올려 보라. 이 경우도 흡사하다. 국물과의 조합을 감안하면 맛을 들이지 않았을때 계란의 밋밋함이 한층 더 두드러진다. 말하자면 국물을 기준선으로 삼고 계란의 맛이 그 위 또는 아래 어디에 자리잡는 것이 더 효과적일까. 나는 윗쪽이라고 본다. 또 다른 짠맛-단맛-감칠맛의 켜가 계란 흰자를 매개체로 삼아 찍어주는 방점 같은 것 말이다.
사진에서 볼 수 있다시피, 베라보에서는 또 다른 계란을 선택할 수 있다. 소위 온천 계란. 이런 요소를 더할 때는 특히 온도의 변화에 대해 민감할 필요가 있다. 조리가 끝난 것을 상온에 보관했다가 더할 경우, 전체 온도를 낮출 가능성이 크다. 또한 국소적으로 계란과 그 주변 부위의 온도는 한층 더 낮을 수 있고, 라멘 전체의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 온천 달걀은 저온 조리로 가장 쉽게 재현할 수 있고(63°C로 45분), 재가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계란의 섬세함 탓에 시간이 지나면 미세하게 조리가 더 되기는 하지만, 아예 서비스 시간에 저온 조리기를 돌려 계란의 온도를 유지할 수도 있다. 또한 흰자 맨 바깥쪽의 묽은 켜는 익히면 너풀거려 보기에 좋지도 않고 맛도 없으므로, 이 또한 미리 깨어 구멍 뚫린 국자 등에 올려 털어낼 수 있다. 내기 직전 깨어 올리는 것이, 맥락과 정황을 감안하면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한편 죽순. 거칠었다. 섬유질도 씹혔다. 준비의 문제보다, 죽순 자체를 놓고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죽순은 어디에서 왔을까. 국산의 철은 아주 짧고 비싸니 생것을 쓸 이유는 전혀 없다. 가공해서 파는 것도 있지만 그 질감에 만족해본 적은 없다. 한겨울의 서울에서 죽순 고명을 굳이 원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라멘 또한 강한 계보와 문법을 따르는 음식이니 재현이 목표라면 좋다. 하지만 반복을 통한 재현은 결국 개념적 이해를 통한 응용의 기반을 닦아 준다. 죽순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 역할을 대신 맡을 수 있는 다른 재료는 없는가. 라면의 계보가 결국은 변주에서 나와 굳은 것임을 감안한다면, 가능성은 많지 않을까. 우엉이나 도라지 같은 건 어떤가. 라멘의 숭고함을 감안한다면 도저히 용납을 할 수 없는 걸까? ‘우리 입맛’의 칼로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난도질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쪽에선 계보와 문법의 재현에 전전긍긍하는 부류가 있다. 각 입지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며, 어느 지점이 이상적인가.
마지막으로 입지. 그제 글에서도 잠깐 언급했듯, 이러한 부류 모든 가게의 입지는 고민거리다. 찾아가는 과정에서 덧입히는 기대의 켜가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 또한 입지에 딸린 요소, 특히 부동산이 가격에 영향을 당연히 미칠 것이다. 동네 장사 음식을 전방위적 입지에서 재현하는 대가로 높은 가격, 일반 끼니 음식의 1.2~1.5배를 치러야 한다면 그 음식의 매력은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정확할까. 이 고민에서 자유로와질 수가 없다.
‘오독’이라는 한 마디를 많은 현상에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글이네요. 저희 남편은 ‘한국에 문맹이 너무 많다’며 투덜거리는데, 조금만 글이 길어도 ‘선비질, 설명충! 빼애애액’하는 내용이 난무해서 어지간하면 읽고 싶지 않지만 guilty pleasure 처럼 가끔은 읽게 되는 포탈의 댓글창들을 보면, 저렇게 잘못 읽기도 쉽지 않은데… 싶은 오독이 넘치고, 그나마 지성인 정상인 코스프레를 하고 사회적 가면을 쓰고 만나는 직장에서의 관계에서도 더 이상 어떻게 잘 설명을 하지?싶은 정성스러운 내용 전달에도 내용과 의도와 전혀 딴 판의 이야기의 심지어는 공감이랍시고 들이대는 사람들이 넘쳐나서, 그저 피곤스러운 요즘입니다.
심지어 맨날 먹는 두통약의 설명서까지도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장르를 그닥 가리지 않고 활자 중독인 저 같은 사람도 있겠고, 고등학교 때에도 교과서 이외에는 읽은 적 없는 이들도 있겠고, 대기업에 다니면서 독후감을 써야하는 필독서 이외에는 읽어본 적 없는 주변의 숫한 지인들도 있고… 그럴 수 있는 세상이다… 라고 납득하려 하다가도, 아니 아무리 입시가 중요하기로서니 12년 교육을 받고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하시오’ 하나도 제대로 못해내는 의무 교육이라니, 답답합니다.
무타히로 계란에 대한 글을 조금 전 읽고 원 글로 돌아왔습니다. 피해자 코스프레도 나쁘고, 비판은 절대 못 받아들이는 태도도 나쁘고, 혼자하는 가게라는 치졸하지조차 못한 변명도 나쁘지만, 계란을 넣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는 식의 무성의한 사람이 해주는 라멘은 정말 나쁜 음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상대방의 언어 폭력에 대해 고민하고 고민하다 문제 제기했을 때에 ‘내가 그랬나? 농담이었을걸?’이라는 답변을 들었던 수많은 대화가 오버랩됩니다.
처음으로 방문하였는데 업무 짬짬히 계속 읽었습니다. 올리브 매거진도 마침 구독하고 있는데, 과월호들을 뒤적여봐야겠습니다. 좋은 글들 감사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올리브 매거진 구독하신다니 더더욱 감사드리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