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통영의 성게비빔밥, 디테일의 부족과 옥동식
얼마전 청담동에 갔다가 오통영에서 성게비빔밥을 먹었다. 21,000원. 실로 여러 가지가 궁금했다. 성게소를 곤죽 같은 상태로 내어 놓은 건 밥의 비빔장 역할을 하라는 의도일까? 충분히 가능하다. 걸쭉한 소스로 만들어 파스타 등등에 짝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멍울이 있는 등 전반적인 상태가 고르지 않았다. 게다가 성게소와 밥의 거리를 좁혀줄 매개체가 없었다. 밥과 성게소, 그걸로 끝이었다. 정말 걸쭉하게 만들어 양념장 역할을 맡으라는 의도였다면 기름이든 산이든 뭐든 원하는 맛과 질감에 따라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난 음식이 미완성되었다고 본다.
그나마 밥 위에 세워 놓은 김 몇 장이 그런 역할로 개입하는 것 같았는데, 이 또한 의도를 정확하게 헤아리기 어려웠다. 아니, 사실은 이 상차림에서 가장 이해가 안 가는 요소가 김이었다. 걸쭉한 성게소와 밥을 섞어 김에 싸 먹는다. 김의 감칠맛이며 기름의 고소함, 소금의 짭짤함 등이 충분히 잘 어울릴 수 있다. 그런데 왜 굳이 넓지도 않은 대접에 “비빔”밥을 담고 거기에 김을 세워서 내는 걸까. 온기가 남아 있는 밥에서 김이 올라올텐데, 그릇이 썩 넓지 않으므로다른 김에게 김을 그대로 옮겨버린다.
덕분에 김은 이미 식탁에 도착했을때 눅눅해져 있었다. 이것은 과연 의도일까? 과연 김을 눅눅하게 먹는 경우가 존재하는 걸까? 21,000원짜리 단품요리라면 성게소가 비싸더라도 김을 정말 서너장만, 그것도 100% 눅눅해질 수 밖에 없는 설정으로 내놓아야 하는 걸까? 반찬도 세 가지나 내오는데, 그걸 차라리 줄이더라도 별도의 접시에 양을 조절해 낼 수는 없는 것일까?
반찬이 제 역할, 즉 밥의 보좌를 거의 전혀 하지 못하므로 의문은 증폭된다. 그나마 나물은 간도 강한 편이어서 김을 더해도 밋밋하고 느글거릴 수 있는 성게와 밥의 조합에서 균형을 맞춰주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치는 매운맛만 튀어 나오고 간이 거의 안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라 특히 성게와 밥의 조합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세 번째 반찬은 곤약조림이었는데, 한 끼 21,000원짜리 음식에 나와서는 안될 반찬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와 동시에 곤약 및 부재료에 간이 전혀 배어있지 않았다. 서울에서 이보다 잘 만든 곤약조림을 먹기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아, 하필 그릇은 이마저 빠져서 더 슬프다.
이미 잘 하고 있고 잘 할 것 같은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비율이 절대 높다고 보지 않으며, 설사 비율이 높더라도 그들이 구세주처럼 한국의 음식 문화를 단박에 개선할 거라 믿지 않는다. 음식 내부의 문제도 차고 넘치지만, 그 바깥의 문제 또한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오통영의 성게 비빔밥을 예로 들었다. 그 자체로도 맛이 없고 음식과 조화를 감안하지 않은 반찬의 등장은 분명 음식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눅눅해지도록 방치하는 김의 설정이나 정확하게 무엇을 지향하는지 어려운 성게소의 상태 등은 굳이 음식의 영역 안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음식이 아니더라도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디자인 등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위 디테일을 헤아리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런 요소까지 식사의 경험에 영향을 미칠 거라 헤아리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옥동식 덕분에 한참 홈페이지가 뜨거웠다. 실제로 먹었던 곰탕은 굉장히 미지근했던 터라, 이 뜨거운 반응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토렴의 산물이기 때문에 미지근하다고? 그렇지 않다. 토렴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지근하다는 말이었다. 넓은 공간도 아니고 12석의 바형 식탁이므로 움직임이 속속들이 보인다. 어떤 환경에서 누가 토렴을 하는지도 다 보인다. 서울에서 이제 보기가 어렵다면 부산의 웬만한 돼지국밥에서는 토렴의 움직임을 식전에 ‘감상’할 수 있다. 토렴 자체는 이제 더 이상 효율적이거나 맛을 위한 조리 또는 준비 방법이라 여기지 않지만, 사람과 뚝배기와 국자가 혼연일체인 듯한 움직임은 때로 아름답다. 국자가 움직이고 국물이 뚝배기에 담겼다가 다시 쏟아지는 소리를 즐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결코 미지근하지 않지만 먹기 편한 국밥이다. 옥동식의 토렴이 과연 이렇게 숙달된 인력 자원에 의해서 이루어졌던가? 원하지 않아도 많은 것이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어떤 요소는 구구절절이 글로 쓰는 게 구차해서 그냥 둘 뿐이다. 내 글의 격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김치가 말썽이다. 나는 늘 말해왔다. 김치를 굳이 먹어야 하겠는가? 그것도 음식 값에 포함되는 공짜 음식으로? 그렇게 손이 많이 가고 발효가 개입되어 맛이 들쭉날쭉할 수 있는 음식을 굳이 공짜로 먹어야 되겠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과연 먹는 이를 위한 발상인가? 아니다. 만드는 이를 생각하기에 계속해서 같은 주장을 펼쳐왔다. 반드시 먹고 싶다면 차라리 돈을 받아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김치로부터 탈출을 시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인력으로 다른 해법을 먹는 이에게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간장, 고추장, 된장을 범벅으로 한데 섞은 디저트를 놓고 창의적이네, 미슐랭 별 셋 감이네 말하며 파격을 높이 사지만 탕반에서 김치와 작별을 고하지 못하고 슬퍼한다고? 앞뒤가 안 맞는다. 각종 나물이 널린 봄에 굳이 고춧가루와 젓갈에 절고 소금으로 숨을 죽인 김치를 먹어야 할까? 그런 김치의 맛이 옥동식의 맑은 국물과 어울리는가? 그렇지 않다.
그리고 한편으로 김치의 상온 보관은 업장의 자업자득이라고도 생각한다. 넓이를 감안할 때 바형 식탁이 공간 구성 면에서 최선인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김치를 반드시 상온에 방치해야 되는 것도 아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입구 바로 옆, 바가 휘어지는 지점에서 공간이 좀 많이 남던데 카트에 아이스박스를 올려 놓고 냉매로 적절히 차게 유지한 채 더 원하는 이에게 조금씩 덜어줄 수 있다. 늘 말하지만 음식은 기술의 측면에서 최첨단을 달리는 산업이 아니다. 음식 산업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라, 나의 전공이었던 건축과 더불어 인간의 육신성과 깊이 맞물리므로 그럴 수 밖에 없다. 요는, 음식의 안에서만 계속 맴돌면서 답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것들을 말하는가? 보이니까 말할 뿐이다. 보이지 않으니까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식을 놓고 ‘원래 그렇다’고 말할때 발전은 불가능하다. 김치는 안 담가도 김치 냉장고는 상당수 갖추는 현실에서 누가 김치는 원래 상온에 두고 먹는 음식이라고 주장한다는 말인가.
아 진짜 좋은 글 입니다. 모든 문장을 공감합니다.
박수가 절로 나옵니다.
맛없는거 맛없다고 하시기도 지겨우시겠습니다. 2만 천원이라니 저라면 화가 날 것 같네요..
맛이 없어서 문제라기보다 왜 맛이 없을 수 밖에 없는지가 중요하겠죠
디테일을 작지만 거대한 것, 그러나 그저 작은 것으로 치부하는 구태가 문제로군요.
어라, 코멘트 수정하는 법을 모르겠습니다;
‘디테일은 작지만 거대한 것인데, 그저 작은 것으로 치부하는 구태가 문제로군요.’
진짜 놀라운 문장입니다.. 이런 류의 글은 안 보는편인데 문장 하나하나가 제게 새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