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 (2)- 계란 까기와 반지성주의
그렇게 나는 태어나서 처음 까 본 계란을 그래도 하수구에 흘려 보냈다. 하지만 이제 희미한 가운데서도 제대로 깠다는 기억이 남아 있으므로 이제 생각보다 마음이 아프지는 않다. 식재료로서 가장 확실한 생명의 상징인 계란을 낭비했다는 유년의 죄책감 같은 것 말이다.
아니, 계란을 제대로 까는 방법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그렇다. 계란의 겉면을 ‘껍데기’라 일컫는다. 한국어에서 ‘껍질’은 무른 표면, ‘껍데기’는 단단한 표면이라 구분한다. 계란의 껍데기는 꽤 단단하다. 판에 몇 개를 담아 유리를 올리면 사람이 올라가도 깨지지 않는다고, 역시 먼 옛날 텔레비전에서 보여준 적 있다. 대략 몇 개쯤인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확실한 생명의 상징이 단단한 껍데기로 보호받고 있으므로, 이를 깰 때 뾰족한 모서리에 쳐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다. 껍데기 자체에 상처를 주는 데는 더 효과적일 수 있지만 계란을 더 잘 쓰는 방법으로는 열등하다. 이유가 뭘까. 깨진 껍데기의 조각이 계란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트 등에 유통되는 계란은 세척 및 살균 과정을 거치지만, 이 과정이 100%의 안전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또한 세척 때문에 표면의 큐티클층이 벗져지므로 오히려 오염에 더 취약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잘 보호 받고 있던 계란의 내용물에 되려 껍데기 표면의 세균으로 오염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조각이 깬 계란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끈적한 흰자 사이에서 골라내는 귀찮음을 감수해야 될 수도 있다.
또한 날카롭게 깨진 껍데기의 조각은 물리적으로도 계란의 완결성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모서리에 대고 계란을 깨면 대체로 둘로 쪼개지는 껍데기의 새로 생긴 가장자리가 날카로와지는데, 그럼 계란이 껍데기를 빠져 나오는 그 짧은 과정에서 노른자가 터질 수 있다. 계란말이-오믈렛처럼 흰자와 노른자를 아예 섞는 전제의 조리가 아닌 경우라면 재료의 가치가 크게 떨어진다. 계란을 하나씩 깨면서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하는데 그런 계란이 어느 쪽에 막을 틈도 없이 섞여 버린다면? 예를 들어 머랭을 올리기 위해 흰자만 갈라 내는 과정에서 노른자가 섞인다면 그 전까지 분리한 건 전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아니면 껍데기가 약해서 모서리에 대고 깨는 과정에서 아예 주저 앉는, 더 나쁜 경우도 있다.
따라서 계란을 깰 때는, 어찌 보면 심지어 계란처럼 흔하디 흔한 식재료를 놓고 제대로 까는 방법이라는 걸 설파하려는 현실도 좀 웃기지만, 평평한 면에 너무 세지 않게 두어번 두들긴 뒤 생긴 틈에 엄지를 넣고 검지로 벌린다.
그런데 대체 계란 깨는 이야기는 왜 지금 하는 것인가? 집에서도 계란말이를 만들거나 전을 부치기 위해 계란을 대량으로 까는 경우가 있지만, 페이스트리류를 대량으로 만드는 제과점 등과는 비교가 안 된다. 얼마 전에도 트위터에서 일본 카스테라 만드는 영상을 보았는데, 커다란 대접에 몇 십에서 백 단위의 계란을 한꺼번에 까는 장면이 나왔다. 과연 제과의 대량생산에서 그렇게 계란을 쓰는 게 효율 및 위생적일까? 신선함 등의 명목으로 얼핏 더 좋아 보일 수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 같은 과정으로 계란이 오염될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
물론 모든 대량생산 제과가 그런 식으로 계란을 쓰지는 않는다. 깐 채로 계란을 납품받는 경우도 있다. 선가공 또는 전처리 업체를 거치는데, 그 또한 수준이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시장에서 계란을 팔듯 큰 비닐봉지 등에 계란을 까서 담는다. 흰자와 노른자가 섞인 상태는 아니다. 이런 경우라면 사실 업장에서 안 깐 계란을 사다 직접 까서 쓰는 것보다 더 나쁠 수 있다. 이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 없으리라.
아니면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완전히 가공을 거친 계란도 있다. 깨서 흰자와 노른자를 섞거나, 아니면 흰자만 분리해서 살균해 팩에 담는다. 흰자와 노른자를 섞어 가공한 것을 ‘전란액’이라 일컫는데, 노른자가 좀 덜 진한 느낌이라는 약점은 있지만 여러 측면에서 굉장히 편하다. 까고 섞는 과정을 완전히 생략할 수 있으니 일손을 대폭 절약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직접 계란을 까서 섞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균일하다. 따라서 업장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쓸모가 많다. 한식이라면 전을 부치는 번거로움을 대폭 줄일 수 있고, 양식이라면 프렌치토스트 등등의 계란물을 쓰는 조리가 아주 간편해진다. 또한 반죽에 마무리로 바르면 계란을 까서 풀어 쓰는 것보다 훨씬 더 편하면서도 빵에 색이 잘 난다.
따라서 이런 용도로 전처리된 계란을 쓸 수 있다면 사실 대량생산 환경에서는 장점일 수 밖에 없다. 메종 엠오 같은 한국 최고의 페이스트리 전문점에서도 이런 계란을 쓰는데 한국에 업체가 한 군데인가 두 군데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런 시도조차 “화학적 가공”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공장이나 기계의 환경을 거치므로 문제가 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대만 카스테라에 대한 탄식을 늘어 놓으면서 계란에 대한 이야기는 뺐는데, 마치 공장에서 액상 계란을 받아다 쓰는 행위 자체가 음식이라는 것의 ‘integrity’를 침해하는 시도로 본다.
공장에서 처리된 계란을 쓰는 것과 그렇게 계란을 가공하는 업체의 위생 등 환경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만약 매체에서 후자를 조명했다면 타당하다. 하지만 전자를 가지고 문제 삼았다면 그것은 무지를 아주 무지하게 자인하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음식의 완성 과정을 놓고 ‘손’의 비유를 쓴다. 한 접시의 음식이 식탁에 오르는데 아주 많은 손이 관여한다. 요리하는 손을 생각하기가 가장 쉽지만 재배부터 가공, 유통 등에도 엄청나게 많은 손이 개입한다.
이 많은 손이 서로 맞잡아 일종의 연결 고리를 형성하는데, 각 손의 정체성이나 배경이 뚜렷하면 뚜렷할 수록 좋은 음식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과학기술이 이만큼 발달한 2017년의 세계에서 그 손 가운데 일부가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해서 정녕 문제가 되는 것일까? 딮 러닝이니 인공지능이니 하는 것들이 나오며 인간의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와 그에 딸린 우려가 나오는 현실에서, 지능이 그다지 개입하지 않는, 지극히 물리적이거나 화학적인 손이 연결고리에 개입한다고 해서 그 음식의 integrity가 과연 망가질까? 그런 수준의 시각으로 현대의 음식이라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 또한 일종의 반지성주의는 아닐까? 하나의 손이 음식에 얽힌 모든 과정을 책임지는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지 않았는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우리가 흔히 먹고 있는 고추장 같은 장류 같은 것은 예전에 실제로 집에서 모두 담그던 것들이었습니다. 이런건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소스류’라는 분류의 ‘가공 제품’으로 편하게 먹으면서 ‘화학적 가공’에 대한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건 굉장히 모순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장을 담궈 먹는게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으며, 사람의 노동력(특히 여성)을 착취해서 얻어지는 물건이었으며, 온갖 날벌래들이 들끓었나 생각해보면 이 정도의 희생(순창에서 취재를 하며 그 지역의 고추장을 먹어본 지인의 말로 맛이 확실히 다르다더군요)은 감내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대게 우리들이 화학적이라며 날을 세우는건 여러 가공이 복잡하게 들어가있는 ‘제품’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비난하기 쉬운 ‘원료’들인 것 같아요. 설탕이 나쁘다고 인체에서 아예 소화가 불가능해서 다량으로 먹을 경우 설사를 일으키는 소르비톨을 먹어야 하는 건 정말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