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 바이 더 씨-사무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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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듯 끊이지 않을 눈이 내린다. 하늘과 바다는 일관되게 잿빛이다. 영화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기억이 났다. 정확하게 저곳은 아니지만, 비슷한 동네들을 수도 없이 지나쳤을 것이다. 그곳에서 보낸 8년을 마무리하는 여정이었다. 보스턴부터 시카고, 서해안 종단, 달라스-포트워스까지, 1,000 마일이 넘는 장거리 여행을 틈날 때마다 했었다. 마지막으로 어딘가 마치 채무처엄 가야한다고 생각했고, 그 어딘가는 북쪽으로 캐나다와 국경을 맞댄 (정)북쪽이라고 생각했다. 맨 처음 타의로 잘렸던 장거리 여정이었던 보스턴에서 점을 이어 끝까지 올라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 도시였던 포틀랜드(메인 주)를 떠나기 전 한 바퀴 도는데, 꼭 저렇게 눈이 내렸다. 내려오며 여름이면 사람들이 복작거릴 작은 어촌에서 철도 아닌 랍스터롤을 먹었다. 그리고 역시 꼭 저렇게 눈이 오는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보았다. 그런 풍광 속에서 영화는 줄곧 사무친다. 종종 과거의 순간들이 끼어들며 숨표를 찍어주지만, 사무침의 결정적인 원인인 또 다른 과거가 등장하면 잠시 돌린 숨결마저 앗아가고 그것으로 끝이다. 아무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사람은 사무치는 삶을 묵묵히 살아간다. 마치 희망 비스무레한 것이 영화의 결말에 등장하지만 새 심장을 찾는 호사를 누리는 존재는, 아니 개체는 기계다. 사람이 아니다.

태어났으면 반드시 죽어야 하듯, 어떤 불행이라도 나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사실 받아들일 수 있으면 의외로 평범하다. 설레임을 느꼈던 순간과 사람이 그대로 뒤집혀 증오와 원망, 고통의 원천으로 변한다. 때로 받아들이기 힘들기에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왜 이런 일이/하필 나에게/저 사람과 얽혀 벌어지는 것일까. 말하자면 특수함에 대한 의문이다. 나의 삶만 이러한가? 나는 영화가 ‘그렇지 않다’는 메시지를 보낸다고 이해했다. 아니, ‘받아들였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가디언의 영화 리뷰에 딸린 영상에서 미셸 윌리엄스는 ‘삶이 끝나야 모든 게 끝난다’라고 말한다. 그가 무엇을 겪었는지 생각해보면 수긍이 간다.

라라 랜드‘를 보고 ‘마음 속에 품어두었다가 위로든 위안이든 필요할 때 꺼내 보고 싶은 영화’라고 그랬는데, 이 영화는 반대의 이유로 마음 속에 품어두고 싶다. 고통을 잊었다고 생각될 때 꺼내 본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영화가, 그것도 아주 좋았다는 말이다. 사무쳐서 굳이 다시 보고 싶지 않다면, 하드카피라도 한 장 사서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싶다.

*사족: 인구 5,000 수준의 이 실존 도시는 원래 그냥 ‘맨체스터’였으나 좀 더 큰 도시인 뉴 햄프셔의 맨체스터와 구분하기 위해 1989년 정식으로 ‘바이 더 씨’를 붙여 개명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