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아틀리에 크렌(**)-형상화의 오류, 기술의 실패
요른 웃존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현상 설계에 당선된 것이 1957년이다. 하지만 1958년에 시작한 시공은 무려 16년이나 걸려 1973년에 마감되었다. 주 이유는 건물의 핵심인 곡선 상단부의 시공 때문이었다. 비용까지 감안했을때, 도면에 존재하는 형태를 건물로 현실화할 기술, 또는 구법을 찾는데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 설계자인 웃존이 여론 압박으로 인해 사임까지 하고 나서야 건물은 현실이 된다(자세한 내용은 여기).
어느 분야에서든 머릿속에 존재하는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려면 기술이 필요하다. 아이디어의 수준에 맞는 기술이다. 머릿속에 속주 멜로디가 흐르더라도 스윕 피킹을 할줄 모르면 표현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이 머릿속에 떠다니더라도 붓질을 못하면 의미가 없다. 요리도 마찬가지다. 콘셉트가 있다면 기술의 수준이 그만큼 받쳐줘야 접시에 담길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요리에서 더하다. 엘 불리나 알리니아 같은 레스토랑의, 물성을 바꾸어 새로운 경험을 고안하는 요리는 적절한 수준의 기술 없이는 불가능했다. 물론 요리가 새롭다고 기술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감자를 깎고 계란을 부치는, 기본 가운데 기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만큼 현대요리를 표방하는 레스토랑에서 기술의 역할은 중요하다. 콘셉트를 받춰줄 만큼의 실력을 갖추지 못했을때 요리는 실패한다. 그 대표적인 경우를 지난 여행에서 접했다. 바로 샌프란시스코의 아틀리에 크렌(Atelier Crenn)이다. 프랑스 출신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2013년, 미국 최초로 미슐랭 별 두 개를 받은 여성 셰프가 된 도미니크 크렌의 레스토랑인 아틀리에 크렌의 콘셉트는 ‘시적인 요리(Poetic Culinaria)’다. 메뉴와 코스가 요리의 이름이나 재료의 나열-현대요리에서 많이 쓰는-이 아닌 운문이며, 접시엔 각 운문의 각 행이 묘사하는 상황이 형상화되어 담겨 나온다. 다소 거친 단순화라고 생각하지만, 한마디로 ‘먹는 디오라마(edible diorama)’수준의 요리가 나온다.
이렇게 셰프가 지향하는 요리의 형상화는 코스 거의 대부분에서 실패였다. 조리에 결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맛이나 질감의 조합에 의구심을 품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보다 자질구레하지만 확연히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실수 때문이었다. 가장 명백했던 예가 ‘아름다운 가을 이파리 아래 자연 미녀가 잠자고 있네(Where the wild beauty is sleeping under the beautiful leaves of autumn)’였다. ‘자연 미녀=사슴 안심’으로 ‘가을 이파리=말린(튀긴?) 채소’로 치환해 사슴 안심 스테이크가 말린 채소 아래 깔려 나온다. 이러한 표현(representation) 자체도 사실 유치하다고 생각하지만, 조리에 결함이 없더라면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낙엽 역할을 하는 채소 이파리에 딱딱하게 씹히지 않아 먹을 수 없는 부분이 꽤 많았다. 익힌 스테이크의 열과 수증기가 바삭함에 미칠 영향도 고려하지 않는듯, 씹을 수 있는 부분 또한 그리 바삭하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결함이 열대여섯 가지에 이르는 요리 거의 모두에서 눈에 들어왔다. 당근 “육포(jerky)”는 찐득해서 이에 달라붙었으며, 전갱이 크루도 위에 얹은 래디시 튀김은 아삭하지도, 부드럽지도 않고 딱딱했다.
코스 전체를 나열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므로 그냥 사진만 몇 장 올린다. 딱히 설명을 더하지 않아도 셰프가 추구하는, 요리의 요소(component)를 통한 형상화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형상화하고 싶은 상황(presentation)을 먼저 설정하고 거기에 재료와 조리 기술을 맞추는 것처럼 보이는데, 통상의 요리와 반대로 흐르는 과정 자체도 동의하기 어려운 마당에 결과마저 변변치 않아 이 레스토랑의 가치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이러한 결함의 원인은 전체적으로 낮은 수준이지, 내가 방문했던 특정 순간의 실수로 분류할만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코스 전체를 관통하는 단맛도 거슬렸다. 사진의 요리는 버섯 볶음이었는데 식감이 느물거리는데다가 생간장의 향이 거슬렸고, 거기에 존재의 이유를 알 수 없는 머랭이 버섯의 느물거림을 배가시키는 한편 단맛까지 더해 순수한 의미에서 역겨울 지경이었다.
음식만 저랬으면 괜찮았을텐데, 그 주변의 요소도 딱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일단 가장 거슬렸던 건 매체를 위한 사진 촬영. 사진사가 레스토랑 전체를 휘젓고 다니는 건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분명 내 식탁으로 와야할 요리가 사진 촬영에 동원되느라 주방에 더 오래 머무르는 걸 빤히 보기란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한편 막말로 멍청하다고 말할 수 있을만한 결함도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사진의, 카라멜을 위한 틀이다. 꿀을 콘셉트로 삼았으니 벌집을 틀에 고정시켜 나오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나사못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건 혹시라도 불거질 (그네들 기준의) 안전문제를 감안해서라도 절대 현명한 선택이라고 할 수가 없다(‘더 신경써야하는 것 아니냐?’ 고 이를 지적하자 서버는 ‘We try’라고 짤막하게 대답.)
바로 이 디저트가 레스토랑의 경험을 축약해준다. 나무로 만든 그릇에 나뭇잎 등을 담아 자연이라 설정하고 그 위에 유리를 깔아 디저트를 담았다. 셰프는 이것 자체를 자연이라 설정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정작 먹는 사람은 그 두터운 유리 만큼 자연과 멀거나, 또는 유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짜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젠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조리란 없다고 생각할만큼 지식과 정보가 많으니, 그걸 제대로 현실화시키지 못한다면 책임은 시도한 사람의 몫이다. 완벽하게 성공해도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콘셉트를 기술이 받춰주지 못했으니, 이건 미슐랭 별이 무색할 정도의 처참한 실패였다. 한마디로 난잡하고 또 너절한 한끼였다.
# by bluexmas | 2013/12/27 17:04 | Taste | 트랙백 | 덧글(4)
전에 CSI 라스베가스 중에 완전한 암흑속에서 먹는 식사를 주제로 한 식당도 있던데
그로테스크 하다고 할까?
아니면 남다른 것에서 느끼는 허위의식에 가득찬 자부심이 거슬린다고 할까?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것보다는 일본 요리사들이 만들어낸 회 한 접시의 데코레이션이 더 아름답다고 느껴지네요.
요리사가 이런 컨셉을 실행하려면 기술도 중요하지만,
인문학이나 철학, 미학에 대한 공부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 Responses
[…] 측면이 가장 두드러졌던 아틀리에 크렌(Atelier Crenn)의 경우를 짚어보자. 이곳은 작년에 두 번째 미슐랭 별을 새롭게 받았다. […]
[…] 비판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면, 3년 전 썼던 아틀리에 크렌의 리뷰를 읽어 보시라. 귀찮아서 내가 직접 만들 수 없다는 이유-물론 다른 이유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