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3대 백화점 최고가 사과 시식기
추석을 앞두고 불현듯 3대 백화점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사과의 맛이 궁금해졌다. 트위터에서 현대백화점의 17,000원짜리 사과 사진을 본 덕분이었다. 정말 개당 17,000원이라고 하더라도 세 군데 백화점(롯데, 신세계, 현대-가나다순)에서 한 개씩 사면 51,000원. 그래봐야 가격대가 약간 높은 데일리 와인 한 병 수준의 비용으로 현재 한국에서 가장 비싼 사과의 맛을 볼 수 있다. 이거야 말로 내가 좋아하는 ‘소소한 돈지랄’의 정수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움직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잘 모르겠는데 현재 사과(홍로)의 가격은 17,000원보다 훨씬 낮은 10,000~13,000원에서 형성되어 있었다.
주목할만한 특징을 품었더라면 개별 평가를 했을 텐데 그럴 만큼의 건덕지가 없었고, 세 백화점의 사과가 굉장히 사이 좋게 맛이 없었다. 단맛도 신맛도 없는 찬란한 무맛이랄까? 맛없음에도 참으로 여러 갈래가 있어서 분노를 유발하는 맛없음, 세상을 한탄하는 맛없음, 자신을 원망하는 맛없음, 한국을 원망하는 맛없음 등등등이 있는데, 이 사과들의 맛없음은 넋 혹은 정신줄을 놓고 사람을 -____-이런 상태로 만드는 맛없음이었다. 세상만사 삼라만상에 대한 생각을 멈추게 만드는 무력함의 맛없음이었다.
그런 가운데 신세계의 사과가 조금 놀라운 기세로 맛이 없었다. 다른 두 백화점의 물건이 ‘저기요, 우리도 애는 쓰는데 잘 안되는 거에요. 참작해서 예쁘게 봐주세요’와 같은 맛없음을 품고 있다면 신세계의 것은 ‘몰라, 나 맛없으니까 먹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와 같은 자포자기의 맛없음을 온 몸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단맛도 신맛도 없는 건 기본인 가운데 선택한 소비자를 비웃는 듯 쓰고 떫었으며 푸석하기까지 했다. 요즘 부회장님의 행보와 매우 궤를 같이 하는 맛없음이었다.
나에게는 이런 사과를 먹는 게 일이므로 맛이 없어도 웃어 넘길 수 있고 돈도 아깝지 않다. 그러나 보통의 소비자가 어떠한 계기로든 이 사과들을 선택했다면 두 갈래의 행동 가운데 한 쪽을 선택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화내기이다. 와! 개당 1만원짜리 사과가 정말 이따위로 맛이 없어도 되는 거냐!!! 혹자는 반쯤 베어물어 먹은 사과를 들고 백화점에 달려 갈지도 모른다. 이거요, 맛을 보세요! 직접 확인하시라고요! 어떻게 이런 물건을 1만원에 파는 거에요? 미친 거 아니에요? 구매자가 이렇게 나온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사과들은 맛이 없었다.
두 번째로는 정당화가 있겠다. 오, 뭐 요즘 사과가 다 그렇지 뭐. 그나마 비싼 거라 좀 덜 맛없네. 말하자면 원효대사의 해골물 모먼트 비슷한 게 벌어지면서 자신의 소비를 정당화하려 드는 것이다. 물론 이쪽이 첫 번째보다 좀 더 불행하지만 비율은 더 높을 거라 생각한다.
하여간, 가장 일반적인 경로로 살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비싸다고 할 수 있는 국산 사과가 절반 수준 가격의 파인애플보다 맛이 없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사과랑 파인애플은 전혀 다른 과일 아니냐고? 맞다. 그런데 내가 먹은 사과들에는 아예 맛이라는 개념 자체가 탑재되어 있지 않았으니 뭐랑 비교해도 상관 없을 것 같다. 오이보다도 맛없었다고 그러면 속이 시원해지려나? 하여간 우리의 현실이 한편 이렇다.
*사족: 웬만해서는 아삭함과 구분을 못하게 만드는 딱딱함도 흥미로웠다. 아삭함이 저작의 절점에서 끊어지는 상태라면 딱딱함은 그렇지 않은 상태이다. 말하자면 시간 축 위에서 질감이 변화하는 지점이 없이 일관적인데, 요즘 품종들이 너나할 것 없이 이렇다. 물론 좀 더 나아가면 요즘 존재하는 소위 쫄깃한 음식들이 다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