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키트 전성기(와 아포칼립스)
1999년, 밀키트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접했다. 가장 일찍 결혼한 친구가 ‘재료를 손질해서 레시피와 함께 아침마다 배달해 주는 서비스’를 쓰는데 편하고 좋다고 했다. 그렇게 개념은 있었지만 ‘밀키트’라는 명칭은 없었다. 이십 년도 넘은 2021년, 밀키트는 생활의 일부이다 못해 거의 힙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왠지 조리를 다 할 줄 알아도 밀키트를 써야 할 것 같은 압박이 공기에 희미하게 섞여 있다.
물론 밀키트의 장점은 아주 명백하다. 장보기부터 식재료 손질에 이르는, 티도 안 나게 번거롭고 번잡하고 사실은 어려운 과정을 건너 뛰어 최소한의 조리와 결과물의 음미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다만 장점을 뒤집으면 바로 단점이 되는 것이 단점이기도 하다. 관점에 따라 사실 밀키트가 처리해 주는 과정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핵심이자 생존 전략일 수 있는데 이 기회를 서비스의 이름으로 앗아가 버리면 불은 피우고 물은 끓이되 음식과 조리 전반에 대한 이해는 그만큼 늘지 않을 수도 있다.
한편 밀키트의 이름으로 소비자에게 노동력의 바가지를 씌울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어 만두나 김밥, 라자냐처럼 매개체로 다른 식재료를 한데 아울러주는 음식의 경우, 최종적인 과정을 생략한 제품을 밀키트라고 판다면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다. 라구를 주고 면은 직접 삶아서 켜를 만들어 구우라는 라자냐는 어떨까? 이런 음식은 모 아니면 도라고, 완제품과 재료만 존재하는 게 바람직하다.
한편 과학적인 측면에서도 밀키트에게는 단점이 있다. 재료를 미리 잘게 잘라 놓으면 표면적이 넓어지므로 맛과 신선도가 훨씬 더 빨리 떨어진다. 사진의 탕평채처럼 조리가 끝난 음식이라면 더하다. 나도 궁금증에 이런저런 밀키트들을 조리해 보았는데, 손질된 식재료들이 싱싱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마지막으로 밀키트의 전성기가 아포칼립스가 될 수 있는 단점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소분해 놓은 식재료는 각각 별개의 (진공) 포장이 필요하므로 다량의 식재료를 구매할 때보다 자원이 더 많이 들 수 있다. 실제로 플라스틱 용기부터 각 재료의 비닐 포장이 많고 번거로와서, 조리를 처음부터 할 수 있다면 밀키트를 안 쓰는 게 낫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물론 밀키트에 맞춰 고정될지도 모르는 입맛 혹은 취향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이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 현실에 밀키트를 배척하자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다만 장점 만큼이나 단점도 존재할 수 있음을 인식은 하고 있자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