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산수갑산-맛의 무의식적 길찾기

IMG_1184김치말이 생각에 강을 건넌 시각이 4시 50분이었다. 그런데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산수갑산 생각이 났다. 도착하니 4시 55분, 바로 앞의 20대 남녀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녁 개시 시각은 5시. 들어가도 되나? 밖에 서 있는데 한 직원이 ‘들어와서 기다려도 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영업이 시작되는 5시 15분쯤, 이미 식탁은 거의 다 찼다.

오랜만에 훌륭하다면 훌륭할 순대를 먹으며 맛의 조합과 선택에 대해서 생각했다. 동물의 내장이나 지방을 바탕으로 만들었으니 순대는 충분히 느끼할 수 있는 음식이다. 그래서 1. 기본적인 소금간이 필요하고 2. 식탁의 다른 요소로부터 느끼함을 덜어줄 맛을 보충한다. 지방이라면 기본적으로는 신맛이다. 그런데 일단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소금간은 전혀 없거나 아주 미미하다. 그렇다면 다른 요소, 한식이라면 반찬 등에서 신맛을 보충하면 된다. 김치라는 훌륭한 원천이 있다.

다만 이론적으로만 그렇다는 게 문제를 넘어서 비극이다. 많은 김치가 신맛을 제대로 발달시키지 못한 채 식탁에 오르고, 산수갑산의 두 김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렇게 기본적인 상쇄의 조합이 부재하는 틈새를 다른 자극이 파고 든다. 고추의 매운맛이나 마늘의 아린 맛이다. 물론 쌈장이 신맛의 잠재력을 일정 수준 갖추지만 전분이라는 매개체의 둔탁함이 덜어주지 못하고 되려 부담을 더한다. 단맛의 개입도 일반적인 한식의 맥락에서 그렇듯 잘라주는 것과 반대로 빨리 물리도록 입과 혀를 부추긴다. 마지막 희망인 새우젓과 소금이 있지만 찍어 먹는 경우라면 분배하지 못하고 방점을 지나치게 크게 찍어 버린다.

IMG_1182그리하여 중심이어야 할 순대에 비해 부차적인 자극을 지나치게 크게 얻으며 맛의 경험이 막을 내린다. 물론 순대를 먹었으니 예를 들었을 뿐, 어떤 음식으로 치환하더라도 시나리오는 언제나 거의 똑같다. 잘라주는 역할을 하는 맛이 아예 부재하거나 제대로 분배된 채로 식탁에 오르지 않으니 이를 상쇄하기 위해 다른 요소로부터 맛을 본의 아니게 과보정한다. ‘한식의 품격’에서 지적한 ‘맛의 외주’의 부작용이다.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그러니까 자주 또는 늘 생각한다. ‘먹는 이가 맛을 조합해서 먹는, 식탁에서 완성되는 맛의 한식’이라는 말 만큼 허상이 없다. 일정 수준 개인의 기호나 선호도가 반영된다고 생각은 할 수 있겠지만, 선택은 완전히 의식적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맛의 무의식적 길찾기 (wayfinding)’라고 제목을 붙였듯, 반찬의 선택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핵심 음식을 두고 빠지는 맛을 상쇄하려는 절차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아주 높다. 싱거우면 소금을 찾는, 뭐 그런 결정 또는 행동 말이다.

Syntax_SD.001이를 시각적으로 정리하려는 시도를 생각하고 있다. 이론이 없더라도 가장 간단한 다이어그램-매핑을 끌어와 쓸 수 있는 사안인데, 그래도 굳이 들먹이자면 기본 개념은 대학원 시절 배웠던 공간구문론 (Space Syntax)에서 착안했다. 밥과 반찬의 조합 속에서도 나름의 길을 찾는 의사결정이 존재한다는 게 핵심이다. 핵심 음식인 순대만을 대상으로 잡아 맛의 상호작용이나 강도를 통한 위계질서 등을 표시했다. 물론 모든 요소의 상호작용을 한꺼번에 정리한다거나, 질감 등의 요소까지 고려하려 든다면 얼마든지 더 복잡해질 수 있다.

많이 깔리나 제 역할을 거의 전혀 못하는 반찬이 얽힌 맛의 경험을 할 때마다 생각하는 음식의 조합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짜장면과 단무지고, 두 번째는 햄버거 (맥도날드, 더블쿼터파운더 치즈)와 피클이다. 김치처럼 공정이 복잡한 음식이 여러 종류 깔리는데 제 역할을 못하거나 아니면 되려 전체 경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이 국가와 민족 차원의 비효율이 미치는 악영향이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전방위적으로 매우 클 수도 있다.

4 Responses

  1. 이소민 says:

    응ㅇ..인정

  2. 세븐틴때문에 저승갔다온 캐럿 says:

    그래도 순대는 다맛있는듯..ㅡㅡ

  3. aCat says:

    이건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 같습니다. 여러 음식을 이런 식으로 표현해가면서 제대로 된 맛지도(?)를 그리는 작업 같은 게 먼저 연상되네요.

  4. 안준표 says:

    산수갑산 땡기네요. 갈때마다.. 감탄하고 오는 집중에 하나. 고기며 순대에 간이 안되어 있는 건 식탁위에서 맛을 조합해 먹으라는 뜻도 있겠지만 그게 조리 과정에서 문제를 가장 덜 일으키는 방법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 아닐까도 싶어요. 고기를 절인 다음에 삶아서 맛을 응축시키는 방법은 프랑스 요리 기법이라고 알고 있는데 저는 지금 상태로도 이 집 고기며 부속에 위화감을 못느끼겠더라구요. 더 맛있게 만들 방법이 있는데 왜?? 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노포들 보면.. 몇십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정착한 조리 프로세스를 함부로 못바꾸거나 안바꾸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해요. 그게 가게의 맛이고 단골들이 계속 찾아주는 이유일수도 있으니까요.

    지방의 느끼함을 끊어주는 반찬으로 요즘은 피클처럼 담근 조그만 매운 고추절임을 주는 순대국집들이 많더군요. 김치는 담그기도 힘들고 맛이 들기까지 관리하기도 힘드니까.(게다가 담그면 비싸지고) 고추절임도 좋은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이유로 마늘이나 양파 장아찌를 주는 식당도 있구요.

    전에 쓰신 글처럼.. 이정도 공이 들어가고 완성도가 높은 돼지고기와 부속 요리를 이정도 가격에 내는 집은.. 따로 불평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계속 장사를 해주는게 고마운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