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피 크림의 질적 저하
프랜차이즈 혹은 대량생산 음식을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다. 지난 주, CJ 본사 뚜레주르의 치즈 케이크에 대해서 쓴 글에 딸려온 반응이 여실하게 보여준다. 대체로 ‘이런 걸 굳이 평가하냐, 원래 맛 없는 음식인데?’ 혹은 ‘이런 음식은 기본적으로 무시해야 나머지가 (혹은 내가) 빛이 난다’라는 두 생각이 지배한다. 그래서 더 이 글을 쓰고 싶어졌다. 나는 되려 이 경향을 우습게 여긴다. 한국은 대량생산 음식이 제대로 바탕을 못 깔아 주는 나라고, 그렇기 때문에 그 위로 전부 불안정하다. 늘 말해온 것처럼 모사나 일관성과 같은, 대량생산의 미덕을 제대로 보여주는 음식이 드물다. ‘창렬 (곧 ‘평창’이 왕좌를 차지할 것이라고?)’과 “혜자’의 양극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성비’의 번뇌도 대량생산 음식이 제 역할을 할 생각이 없기에 벌어진다.
각설하고, 오랜만에 크리스피 크림 도너츠를 먹었는데 그 허섭한 완성도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롯데 본점 지하의 매장이었다. 풀죽은 밀가루 덩어리가 설탕풀을 뒤집어 쓰고 웅크리고 있는 형국이라니. 실소는 빠르게 슬픔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일종의 고전이 망가지는 형국에 슬펐다. 도너츠는 그리 복잡한 음식도 아니고 심지어 낯설지도 않다. 믹스에 물을 탄 반죽으로 튀기는 도너츠는 심지어 중년인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존재했다. 게다가 크리스피크림 도너츠는 이미 1997년 스미소니언 미국사 박물관에서 사료를 접수할 정도로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 받은 음식이기도 하다.
이렇게 사소하지만 나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음식을 인구 천만의 국제 도시 한복판에서 풀죽은 모습으로 만나면 먹는 이도 풀이 죽을 수 밖에 없다. 맛없는 도너츠와 딱 걸맞게 멀건 한약 같은 커피를 마시다 보니 생각이 극단적인 지점까지 이른다. 기본 글레이즈드 도너츠는 그렇게 복잡한 음식이 아니다. 비교가 좀 그렇지만 김치 같은 한국의 전통 음식에 비하면 간단하고 대량생산의 맥락 속에 편입시키기도 수월하다. 그런데 이런 음식마저 완성도를 보장 받지 못한다면, 더 복잡한 나머지 음식의 품질을 보장받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 아닐까?
비단 김치나 고추장 같은 “진짜” 한국 음식의 문제만 한국 음식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울타리 안에 속한 음식은 모두 한국 음식이라는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한국 음식이든 아니든 상관 없이, 이미 출근길에 커피 한 잔씩 마시고 퇴근 길에 하루 종일 받은 업무 스트레스를 이런 도너츠 같은 음식으로 풀고 싶어하지 않는가. 이런 도너츠를 제대로 먹을 수 없는 현실이라면 소위 ‘아티장’ 음식 같은 걸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뭘 어떻게 하면 저런 것마저 저렇게 되는 걸까요…? 🙁
100의 자원(인건비/재료비를 막론하고)이 필요한 음식에 80~90만 돈써서 만드니 그렇게 되는 거죠. (그렇다고 그 나머지 10~20이 단순하게 사장님 주머니로 모조리 들어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단순한 음식? 10의 자원이 필요한 음식에는 또 8~9만 자원을 투자하는데 제작 난이도는 완성도와 상관 없다고 봅니다.
크리스피 크림을 처음 먹어본 건 미국 사는 친구(산호세) 만나러 갔던 2000년 초반이었어요. 바로 만들어서 뜨끈한 도넛을 샘플이라고 하나씩 주는데..이거 한국 들여오면 대박이겠다..라고 생각했었는데 몇년후에 들어오더군요.
초창기에는 매장에서 직접 만들기도 하고 샘플도 미국처럼 인심좋게 주고 하더니..요즘에는 생산 시설도 매장에서 없애고 공장에서 만든 제품만 파는 모양이군요. 맛은 그럭저럭 비슷하긴 해도 갓만든 뜨끈뜨끈하고 입에서 녹아 없어지는 그 맛을 못보는 건 유감입니다.
미국이랑 한국은..여러모로 외식산업의 지형이 다르기도 하고..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뭣보다도 빠르게 변하는 입맛이라던가..지나가버리는 유행탓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