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단 미어볼드와 ‘모더니스트 퀴진’

2018년 새해 기획으로 ‘모더니스트 브레드 총력 리뷰’를 계획 중이다. 1월 한 달을 다 쏟아 붓는 대기획? 일단 맛보기로 예전에 기고했던 네이던 미어볼드와 모더니스트 퀴진의 짤막한 프로필을 올린다. 모더니스트 퀴진은 평양냉면과 미슐랭 가이드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다룬 주제 같은데 이 글은 아직도 올린 적이 없다니 나름 신기하다. 글에서도 우스개처럼 ‘덕중지덕은 양덕이다’라는 문구를 썼는데 ‘양덕의 왕’이 네이단 미어볼드고 나는 그의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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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 중의 으뜸은 양덕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한 가지 만을 죽어라 파는 ‘오덕후’, 즉 오타쿠 가운데서도 서양 오타쿠가 가장 열정적이라는 의미다. 뉴욕 같은 극히 일부의 대도시에 사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우리보다 느리게 흘러가는 삶을 살기에, 그만큼 열중할 만한 대상을 찾았을 때 깊이 빠질 수 있어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한 양덕 가운데에서도 급이 다른 ‘왕’이 있다. 바로 네이단 미어볼드(Nathan Myhrvold)다. 이름 앞에 아무런 수식어도 붙이지 않은 건 경력이 지나치게 화려한 탓이다. 하나만 꼽기가 어렵다. 뿌리를 따지자면 그는 과학자다. 응용수학과 이론 물리학을 공부해 캠브리지 대학에서 스티븐 호킹 교수의 연구를 돕기도 했으며, 마이크로 소프트에 14년간 전략 및 기술 담당 최고 책임자로도 일한 바 있다. 이후 자신의 회사 인텔렉츄얼 벤쳐스(Intellecutual Ventures)를 설립해 발명과 특허 기술 개발에 힘 쏟고 있다. 현재 인증까지 받은 기술만도 328건, 미국 특허청을 검색하면 <극저온을 이용한 굴 껍데기 까는 법> 등이 눈에 들어온다.

이렇듯 양덕의 왕으로서 그의 ‘덕심’이 가장 밝게 빛나는 분야가 바로 음식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키워온 열정이다. 불과 아홉 살의 나이에 도서관의 요리책을 뒤져 칠면조를 비롯한 추수감사절 식탁 일체를 차려낼 정도였다. 집에 바비큐 기계를 들여놓으려다 인연이 닿아 달인과 합류, 세계 바비큐 챔피언 선발전에서 우승한 전력도 있다. 심지어 일터를 잠시 떠나 프랑스의 학교며 시애틀의 레스토랑을 거쳐 정식으로 요리 수업 및 실습마저 받았다.

M02사정이 이렇다보니 그가 <현대 요리(Modernist Cuisine)>를 펴냈다는 사실이 전혀 어색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 과학과 요리의 집결체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건 DIY 정신 덕분이었다. 새로 집을 지어 첨단 주방기기를 잔뜩 들여놓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한 정보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수비드(Sous-Vide)’였다. 진공 포장한 재료를 끓는점보다 낮은 온도의 물에 담가 천천히 익히는 조리를 위한 기구다. 답이 없다면 스스로 찾는 것도 방법인지라 그는 실험에 돌입한다. 쇠고기부터 연어에 이르는 다양한 자료를 익혀가며 온도와 조리시간 및 상태를 파악하는 한편 ‘매스매티카’ 같은 프로그램으로 재료의 크기며 형태에 따른 열전도율을 시뮬레이션 한다. 결과를 음식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에 공개하니 ‘책을 내라’는 반응이 나왔고, 이를 동기로 그는 요리사들을 모아 프로젝트를 발족한다.

그리하여 2,400쪽, 여섯 권에 20kg이 훌쩍 넘는 요리책이 탄생했다. 무게와 부피 탓에 아마존의 배송 테스트에 실패, 두꺼운 아크릴 상자를 따로 짜 담아야만 할 정도였다. 책은 지금껏 규명된 조리 이론과 소위 ‘분자요리(Molecular Gastronomy)’라 일컫는 최신 요리 기법을 총망라한다. 한편 과학은 조리의 원리를 꿰뚫어 보는 눈, 기술은 그를 바탕으로 여태껏 불가능했던 완성도를 이끌어내는 손발의 역할을 각각 맡는다. 햄버거 패티는 간 고기의 결을 살린 채로 빚어 저온 조리를 거친 다음 액체 질소에 튀겨내, 겉은 바삭하면서도 속은 레어로 익힌 듯 부드럽다. 또한 프렌치프라이는 초음파 처리를 포함해 무려 다섯 가지의 다른 레시피를 통해 완벽히 튀겨낸다. 지나치게 장비에 의존한다는 비난 아닌 비난에 가정용 조리도구로만 실현 가능한 레시피를 개발해 <Modernist Cuisine At Home> 또한 펴냈다. 합성에 거의 의존하지 않은 조리 순간을 담은 기구의 단면 등, 조형적인 아름다움이 넘치는 음식 사진 만으로도 책의 가치는 차고 넘친다. 이를 주방에서도 마음 놓고 쓸 수 있도록 방수 종이에 초고해상도로 담은 한편, 아예 따로 모아 <Photography of Modernist Cuisine>이라는 별개의 책도 출간한다.

-한국타이어 사외보 ‘뮤(Miu)’ 2013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