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갈이의 다소 장렬한 최후
키친에이드 스탠딩 믹서에 부착해서 쓰는 고기갈이가 수명을 다했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금속과 이음매가 쪼개지다 못해 벌어졌다. 온도를 최대한 낮추기 위해 고기를 갈기 전 부품과 그릇 일체를 냉동실에 넣어 두는데, 이 과정을 10년쯤 되풀이하다 보니 팽창과 수축을 통해 결국 파손된 모양이다. 미트볼을 제대로 만들어 보려고 고기를 준비해 놓은 상황이라 마지막으로 조심스레 갈았다.
이제 10년을 넘어서는 조리도구들이 하나둘 씩 수명을 다하고 있다. 같은 믹서에 끼워 쓰는 파스타 롤러도 제 구실을 못하고 있고, 타이머 겸 탐침 온도계도 죽었다. 맨 처음 쓰던 와인 코르크 따개도 헛돌아가서 버렸다. 전부 정말 할 게 없어서 요리쇼를 따라 더듬더듬 만들던 시절에 산 것들이라 나름의 애착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거의 제 수명을 다 하고 가는 셈이니 어쩔 도리는 없다.
굳이 같은 도구를 갖추지 않더라도 고기를 직접 가는 건 가정 요리의 영역에서 손이 의외로 많이 가지 않으면서도 만족도가 큰 일이다. 특히 간 고기가 대부분 자투리 활용을 위한 궁여지책이므로 지방의 비율을 조절하기가 어렵고 대체로 건조한 편이라는 현실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고기 많이 먹는 나라들에서도 그렇게 접근하는데, 한국에서 귀찮다는 이유로 갈아 놓은 고기를 사면 한층 더 심한 것 같다. 굳이 고기를 가는 원인이 크게 ‘분해 후 재조립’임을 감안하면 기름기가 너무 없는 고기는 무엇이든 최종 목표인 음식을 한층 더 맛없게 만들 수 있다. 조리법이나 밀도의 추구 등도 영향을 미치지만 동그랑땡이 대체로 뻑뻑한 이유의 한 축이 고기에 있다고 본다.
하여간 많이 갈았다. 이 블로그에 등장하는 모든 간 고기 음식은 전부 이 도구를 거쳤다. 수많은 햄버거는 물론이거니와 미트볼, 파테, 심지어 동그랑땡까지 갈아 만들었다. 너무나도 뻔한 인사지만, 지난 10여년 동안 수고해준 고기갈이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덕분에 많이 갈았다. 그나마 마지막 미트볼이 잘 생겼을 뿐더러 먹을만해 참으로 다행이었다. ‘푸드 랩‘의 레시피 역시 훌륭하다.
안녕 안녕 그는 훌륭한 조리기구였군요.
조침문처럼 장황한 글은 아니었지만 고마워하는 마음이 담긴 글이니, 고기갈이님은 평안히 가실 겁니다. 근데 나중에 내세에서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약간 고어한 상상이… 뭔 소리래;
내세에서 만나면 저를 갈아버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