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 우유의 출현, 한국 우유의 현실
간만에 코스트코에 들렀더니 미국산(정확하게 말하자면 캘리포니아산) 우유가 들어왔기에 마셔보았다. 간만에 미제의 정취를 느껴보고자… 는 아니고, 가격(1/2갤런, 즉 1.89L에 3,990원)과 품질을 견주어 보고 싶었기 때문. 120도에 2초인가 순간 살균을 했고, 굳이 그 결과는 아니겠지만 맛은 썩 훌륭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네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보통 우유가 1L(또는 930ml)에 2,500원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그보다는 나은 선택이다. 맛도 동급의, 순간 살균한 우유들보다는 낫다. 물론, 이것 말고도 멸균형태로 뉴질랜드인가 호주산을 백화점 식품 매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멸균이라면 모든 균을 죽였으니 맛도 그만큼 깎여 나갔을테니 굳이 마셔야 할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넓어진 선택지가 설사 미미하다고 해도 가뜩이나 소비가 줄어 고민이라는 국산 우유의 형편에 영향을 미칠텐데, 그렇다면 대체 한국 우유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얼핏 상황을 살펴보더라도 한국의 우유는 총체적인 난국에 빠진 듯 보인다. 예전보다 음식에 대한 선택이 넓어졌으니, 맛은 물론 영양의 측면에서도 굳이 우유를 마셔야 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인구 대비 유당불내증 비율이 높으니, 속 불편한 걸 참아가며 먹어야 할 이유도 없다. 계속 마시면 적응된다고도 하지만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먹어야 될 당위성을 잃은 것이다. 게다가 원가보다 높은 비율인 유통마진(링크 참조)은 소비자에게 품질 대비 가격에 대한 불신을 안긴다. 실제로 마트에서 가장 평범하게 살 수 있는, 리터당 2,500원대 제품은 맛이 없다. 더 이상 영양의 측면에서 호소를 못한다면 맛이라도 좋아야 되는데, 그럴 수도 없는 형편이다. 한마디로 품질을 감안할때 더 싸게 팔아야 하는 물건을 그렇게 팔지 못하니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살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다.
그럼 우유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고급화 전략이 먹힐까. 유기농, 동물복지, 단일 목장 등을 내세워 다양한 고급 제품이 나오고는 있고, 마셔보면 맛이 아무래도 일반 우유보다 낫기는 하다. 하지만 이 또한 이미 거품 낀 보통 우유의 두 세배의 가격을 치르고 살만한 매력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래봐야 궁극적으로는 맛 아닌 생산량 위주의 품종인 홀스타인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이제서야 저지종 소를 키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상용화까지 걸리는 기간은 그렇다고 쳐도 어차피 홀스타인의 테두리 안에 머무는 “고급” 우유의 가격을 감안할때 저지의 가격이 친절할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 게 또 다른 문제다. 저 링크의 대담만 보아도 자꾸 영양의 측면을 강조하는데, 굳이 우유에서만 영양을 얻는 현실도 아닐 뿐더러, 맛 없이는 영양도 무의미하다. 이래저래 나의 예감은 불길하다. 정작 저지 우유가 상용화되더라도 높은 가격 등으로 인해 잘 팔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가공품 시장으로 국면 전환을 꾀할 수 있을까. 일단 크림이나 버터는 한식에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다. 그럼 제과제빵이나 양식의 경우는 어떨까. 생산이 늘어 가격이 내려가면 수요도 많아져 여태껏 가공버터나 식물성 크림을 쓰던 제과업체 등에서 재료를 바꾸게 될까? 정확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굳이 그런 재료를 쓰는 이유가 단순한 재료비 뿐 아니라 온도에 따른 형태 변화 등의 가공 및 유지의 편의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치즈는 어떨까? 치즈의 종류가 점점 다양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치즈=개별 포장 슬라이스’라는 인식이 있는데다가(물론 맛이 떨어지지만 그런 “치즈”의 편리함은 주로 애들 간식 등으로 삼는 부모에겐 중요하다), 그러한 치즈의 원재료(응유)는 수입산인 경우가 많다. 사실, 따지고 보면 마트에 하나둘 씩 세를 불려가는 치즈 또한 거의 대부분이 수입품이다. 국산은 없느냐고? 물론 있지만 정말 맛이 없거나, 전라도 등지에서 공방이나 조합 형식으로 소규모 생산해서 파는 건 일단 가격 경쟁력이 많이 떨어진다. 예를 들어 100g에 10,000원대라면 코스트코 등에서 살 수 있는 24개월 숙성 파르메지아노 레지아노보다 비싼데, 그만큼의 매력은 없다. 늘 하는 얘기지만 생산자가 아직 고급 제품을 생산할 안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치즈처럼 같은 재료로 무수히 맛을 만들어내는 음식은 기호품에 속하므로 영양보다 맛 위주로 접근해야 된다. 백 가지 치즈가 나온다고 해도 같은 우유로 만들었는데 영양의 차이가 크면 얼마나 크겠는가. a, b, c, d, e, f 가 다르면 다름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사실 맛 빼고 없다. 한편, 요거트는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우유를 많이 농축해야 하는 그릭 요거트(일반 요거트를 한 번 더 걸러냄)가 여러 회사에서 나와 반갑기는 하지만 또한 대부분이 설탕 등으로 단맛을 낸지라 딱히 손은 가지 않고…
뭐, 결론을 일부러 내지는 않겠다.
2 Responses
[…] 월급 대신 유제품을 “자발적 구매”해야 하는 상황이란다. 예전 글에서 언급했듯 한국 우유의 설자리는 애매하다. 효능식품으로 모는 경향이 […]
[…] 짜리를 15,000원에 사왔다. 안 팔리는 우유 처분 용으로 만든 분유 아닌가? 우유에 대해서야 예전에도 썼으니 동어반복은 하지 않겠다. 어차피 먹을 동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