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대기자
얼마 전 시집을 몇 권 샀다. 다소 개인적이었으므로 그 이유에 대해서 구구절절이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그런데 사고 얼마 뒤, 시인 한 사람이 고전 음악 지휘자를 비난하는 글을 썼다. 그가 어디에서 책을 내는지 찾아보지 않았는데, 하여간 요즘 내가 산 시집 가운데 그의 것은 없다. 어쨌든 생각해보았다. 나에게 시집 구매의 의미는 무엇인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 글에 뭔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글쓰기에 도움 안 되는 일이 사실 없다. 산책도, 웨이트 트레이닝도, 떡볶이도 도움이 된다면 된다. 그러나 안된다면 또 별로 되는 것도 없다. ‘실용’의 잣대로 한없이 들어다보면 이 모든 게 움츠러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어쩌면 시집은 나에게 쓸데 없다. 하지만 그래도 산다. 무엇보다 세상을 ‘실용’이나 ‘쓸모’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 또한 마음 먹고 시도하자면 가능하다. 하지만 재미없을 것이다. 이미 삶은 충분히 재미없으니, 여기에서 더 재미없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시집도 사고 그룻 피겨도 사고 여행에서 마시고 남은 유리 우유병도 그냥 트렁크에 쑤셔 넣어 가지고 온다. 재미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다.
이 글이 요즘 불거져 나온 문제와 정확히 관련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건 아마 오늘 읽은 글이 내가 쓸 무엇보다 더 좋은 역할을 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아예 관련 있는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그냥 아무 거나 써보려고 한다. 시인 얘기는 했으니까 이제 대기자 이야기를 해보자. 몰랐는데 그는 어느 신문의 대기자라고 했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나는 그의 트윗을 본 적이 있다. 영화가 하도 재미 없어서 카톡을 ‘했다’던가. 아니, 본인의 표현을 빌자면 그냥 ‘보았다’던가? 하여간 본질은 극장에서 전화기를 켜 다른 사람의 관람을 방해했다는 사실인데 자꾸 다른 화제로 돌리는 기술이 능수능란한 동시에 제 정신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경지인지라 그냥 좀 정신상태가 좋지 않은 386이나 그 윗세대의 무명씨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기자라고 한다. 하하. 웃었다. 개인의 총합이 단체는 아니겠지만, 간판 가운데 한 명이 저런 수준이라면 별 생각 없는 독자의 입장에선 단체가 멀쩡하리라고 생각하기가 어렵다.
하여간 지금의 이 일에 대해 내가 차마 글로 다시 옮기기조차 구차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은 다음, 그는 자신도 취미가 있으며 그게 원예라는 말을 덧붙였다. 네, 그러시군요. 나는 궁금했다. 고전 음악에 돈을 쓰는 게 문제라면 시나 원예에 쓰는 건 괜찮은가? 어차피 실용적인 삶을 사는데는 셋 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전 음악을 듣던 시집을 읽거나 원예를 하던, 쌀이나 돈이 나오지는 않는다(물론 관상용이 아닌 식용 작물을 키운다면 모르겠지만 그건 ‘재배’나 ‘경작’이지 원예는 아니니까). 아, 고전 음악에는 돈이 많이 들지만 시나 원예에는 그보다 적은 돈이 드니까? 1, 2, 3만원짜리 공연 표도 있고 심지어 무료 공연 관람의 기회도 있다는 이야기는 클래식 문외한인 내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입이 닳도록 말했을테지만 이미 그런 수준의 저열한 말과 글을 뱉을 사람들이라면 귀도 막혔을테니 내가 동어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거기까지 굳이 끌고 갈 필요도 없다. 취미 생활의 가격 비교 사이트 같은 것이 있어서 비교하고픈 항목에 체크, 체크, 체크해서 ‘클래식 공연 얼마, 시집 얼마, 원예 얼마’하는 식으로 “가성비” 따져 취미생활할 것 아니지 않은가. 진짜 문제는, 저 논리는 멀쩡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곧 블랙홀처럼 실용이 아닌 모든 것을 빨아들이라는 점이다. 음식? 다 쓸데 없고 그냥 칼로리 등등 계산해서 그에 맞춰 최소한의 영양분만 공급하면 된다. 죽지 않는 게 목적 아닌가? 미식이니 식도락이니 하는 것들, 하나 쓸데 없고 비만과 성인병의 원인이다. 옷은 또 어떤가? 고르기 귀찮은데 차라리 단체복을 맞춰 입는 게 낫지 않을까? 0.5초만에 영화 한 편 다운로드 받는 스마트폰 따위, 사실 필요 없다. 그냥 피쳐폰만 있어도 육성 통화는 얼마든지 그낭하다. 트위터? 페이스북? 사는데 그게 뭐 도움이 되는가 말이다.
아, 네. 맞습니다. 먹고 살기 어려운데 뭐 취미 따위 찾느냐고요. 사실 내 일도 세상천지에 쓸 데 하나 없다. 대체 좋은 음식에 대해서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너무나도 진부한 예일 수 있지만, 블루스는 미국 남부에서 착취 당하던 노예들로부터 나왔다. 그들에게 노래는 현실을 달래는 수단이었다. 아, 네. 맞습니다. 우리는 물론 채찍으로 맞아가면서 목화를 따는 뭐 그런 노예는 아니다. 하지만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 ‘저녁이 없는(또는 있는) 삶’이라는 말을 다들 입에 달고 사는 요즘 아닌가. 그런 삶을 잊기 위해 다들 그런 쓸데 없는 것들 하나씩 찾는 거 아닌가. 그게 그저 고전 음악이거나 원예거나 시거나 건프라일 뿐이다. 따라서 당신의 시가 존중 받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의 고전 음악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건 어찌 보면 ‘취존’, 즉 취향의 존중과는 또 다른 문제다. 그보다는 한두 단계쯤 더 위에 있는 개인 간의 거리를 존중해주는 것이다. 이념이나 정치 따위로 사람은 편을 가른다. 그건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잣대를 고전 음악이나 시나 원예나 건프라에 똑같이 들이대어 편을 가르려 든다면, 그래서 최소한의 공감대조차 형성할 수 없다면 난 정말 그게 나라든 뭐든 미래가 없다고 본다. 나는 시인의 시를 싫어할 수도, 대기자의 원예 솜씨를 비웃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가 세상 천지에 쓸데없다거나, 원예 따위 해봐야 과일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아무 소용 없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 않으니까. 최소한의 얼개를 갖추고 다 함께 그럭저럭 살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먹고살기 바쁘면 취미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들중에 정말로 취미생활을 가지기 힘들만큼 바쁜사람이 몇이나 될지도 의심스럽네요. 적어도 남의 취미생활에 굳이 첨언할만큼 여유가 있는사람들은 거의 해당사항 없을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