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Port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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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틀랜드 사진 모음

약 10년쯤 전 어느 연말, 포틀랜드에 처음 발을 디뎠다. 킨포크도, 힙스터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도시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기념비, 마이클 그레이브스의 시청사 건물만 보고 깍두기처럼 끼워 넣은 1박 2일 중간 기착지였다. 하지만 도시가 왠지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갔다. 3년 전에 사나흘을 더 머물렀고, 작년에는 아예 아파트를 빌려 한 달 동안 살았다. 갈 때마다 서부의 다른 주요 도시도 들르지만, 쏟는 시간과 마음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진다. 왜 그럴까. 얼핏 보면 포틀랜드는 어중간하다. 날씨는 샌디에이고나 로스앤젤리스가 훨씬 더 좋고, 아름다움은 샌프란시스코에 못 미치며, 시애틀에 비해서 규모도 작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 보고 돌아다녀보면 그 어중간함이 사실은 적절함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린다. 그래서 살기에 더 좋은 도시다. 1980년부터 지금까지 20~39세 사이의 연령층이 단지 살기 위해 포틀랜드로 이주했다는 통계 자료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일단 규모부터 그렇다. 도시로서 온갖 편의 및 문화 시설을 품을 정도로는 크지만, 지나치게 복작거려 서울처럼 외출이 모험일 지경도 아니다. 적당히 조용하고, 또 걸어 돌아다니며 좋아하는 걸 찾아 나서기 딱 좋다. 게다가 포틀랜드는 여느 중소규모 미국 도시와 달리 대중교통이 발달한 환경친화적 도시인데다가, 자전거를 타기에도 좋다. 도로뿐만 아니라 겨울에도 아주 춥지 않은 기후와 침엽수림이 대표하는 자연 환경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적절한 규모의 도시와 거기 딸린 문화 자원, 환경 및 자연 친화적 자세를 한데 아우르면 포틀랜드인의 전형을 빚어낼 수 있다. 힙스터?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여간 적절히 느긋하면서도 자연에 기대어 디테일의 완성에 몰두하는 부류가 있고, 그 영향력은 홀푸드 카운터에서 파는 립밤에서 음식, 커피에 이르는 다양한 영역에 골고루 묻어난다.

그래서 도심에만 머물러도 즐겁지만, 운전이 가능하다면 교외에 나가 보는 게 도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름도 아무 것도 모르는 강이나 산, 침엽수 사이를 달려도 좋고, 포틀랜드 음식 문화의 멍석을 깔아주는 와인을 찾아가도 좋다. 차를 몰아 남쪽으로 한 시간 정도 거리의 윌라멧 골짜기는 피노 누와르의 주요 산지, 개방된 양조장에 들러 포도밭을 굽어보며 시음을 한 뒤 마음에 드는 와인을 사다가 저녁 식탁에 올릴 수 있다. 식재료는 매주 토요일마다 포틀랜드 주립대 교정에서 열리는 직거래 장터에서, 도시의 분위기를 함께 맛보며 살 수 있다.

해먹는 데 취미가 없다면 사먹으면 그만이다. 남성지 GQ의 음식 비평가 알란 리치먼은 2년 전, 24쪽짜리 특집기사를 통해 포틀랜드를 ‘있을 음식 다 있는 도시’라 소개했다. 너무 춥지도 또 덥지도 않은 기후에 바다를 끼고 있으니, 일단 재료부터 풍부해 참으로 그러하다. 제 정신 아닌 도너츠를 파는 관광 명소 부두 도넛(Voodoo Doughnut)과 좁은 공간에서 웨이팅 스탭이 군무를 추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프렌치 파인 다이닝 르 피전(Le Pigeon)의 양 극단 사이에 아시안, 아르헨티나, 미국 남부가 공존한다. 때로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에 비해 디테일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다이닝 씬’으로는 도시의 규모와 맞물려 하나의 유기체 같다.

식사를 마쳤다면 드디어 커피의 차례다. 이제 국내에도 들어온 스텀프타운(Stumptown)? 알파도, 오메가도 아니다. 그 밖에도 너무 많은 로스터리와 카페가 있다. 심지어 같은 스텀프타운 콩으로 다른 표정의 커피를 내리는, ‘멀티 로스터리’ 또는 큐레이션 개념의 카페도 많다. 그러니 에이스호텔의 스텀프타운을 ‘성지순례’했다면, 다음 차례는 개성이 뚜렷한 코아바(Coava)나 하트(Heart) 커피 로스터즈 같은 곳이다. 커피에 곁들일 단 음식이 필요하다면 아침엔 블루스타 도너츠(Blue Star Donuts), 저녁엔 솔트 앤 스트로(Salt & Straw)의 아이스크림을 택할 수 있다 . 그렇게 도시를 맛보고도 기운이 남아 있다면 도심을 가로지르는 윌라멧 강가를 거닐면 되고, 아니면 세계 최대 규모 독립 서점이라는 파월 북스토어에 앉아 마음 가는 대로 느긋이 책장을 넘기면 된다.

-‘그라치아’ 2014년 10월 2호

4 Responses

  1. JINSU says:

    오리건에 1년 넘게 사는 동안 포틀랜드에 거의 매주 갔었어요 너무 좋아서.. 저는 수요일/토요일에 여는 시맨스키 광장 파머스 마켓에 주로 갔었는데 거기서 먹었던 스트릿푸드들 아직도 생각나네요. 시애틀부터 엘에이까지 서부여행 쭉 했지만 포틀랜드를 제일 좋아하구요. 글에 나온 이유에 완전 공감해요.

    • bluexmas says:

      네^^ 좋은 동네입니다. 오레곤에 사셨었군요. Redwood 많은 동네 좋더라고요.

  2. 이재칠 says:

    트레일블레이저스나 나이키 본사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가볼만한 곳이군요.

  3. pado says:

    학창시절을 보낸곳이네요. 정말 살기 좋은 도시입니다.
    언젠가.. 꼭 돌아가고싶은 곳이랄까요

    rip city, rose city
    커피의 도시
    나이스한 사람들과 따사로운 햇살, 날씨까지
    비록 비가 많이오고 스산하기까지 하지만
    또 나름의 매력이 있는 겨울

    체리도 정말 맛있답니다. 체리시티라고 불리기도 하는 Salem과도 가까워서요

    다른 포스트보고 들어왔다가 반가워 리플남기고 갑니다
    글 참 잘 쓰시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