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의 이해(14)-손님의 격

P1300926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인기라는 연남동의 이탈리안에서 저녁을 먹었다. 집을 나서기 전 옷차림을 놓고 잠시 고민했다. 더운 날씨에 잠깐 반바지 생각을 했다. 행선지도 스스로 오스테리아라 칭하는 곳이니 그만하면 무리가 없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고민하던 가운데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문을 닫은 지도 1년이 넘은 홍대의 레스토랑, 같은 계절과 시각의 토요일이었다. 홀에 셰프가 나오자 쫓아와 구면이라며 인사를 청하는 30대의 남자, 그가 바로 반바지 차림이었다. 심지어 운동화에 야구모자까지 갖춰 입고 신었으니 레스토랑을 위한 차림새는 아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니 반바지를 입겠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물론 남자와 일행이 맹물에 달랑 파스타 두 그릇과 디저트 한 접시만 먹고 갔다는 사실까지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같은 입장에서 먹지만 레스토랑의 격이 떨어지는 데는 손님의 책임이 가장 크다. 지난 호에서 레스토랑의 전반적인 몰이해를 질타했는데, 손님은 그 위에 몰지각을 끼얹어 상황을 악화시킨다. 심지어 제대로 하는 곳에서도 행동양식이 딱히 다르지 않다. 반바지를 언급했지만 그 정도라면 애교다. 손님이 망치는 분위기는 드레스코드나 테이블 매너의 범위를 훌쩍 벗어나는 문제다. 사회 전반에 걸쳐 예의가 실종된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한다. <좋은 사회 운동본부>를 위한 칼럼은 아니니 가장 거슬리는 유형 하나만 지적하겠다. 바로 ‘전세 손님’이다. 말 그대로 레스토랑을 온통 전세라도 낸 것처럼 웃고 떠든다. 덕분에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종종 잊는다. 얼마 전 점심에 찾아간 비스트로에서도 맞닥뜨렸다. 나와 중년 여성 세 명의 두 팀이 전부였는데, 6~7미터는 족히 떨어진 거리에서도 각각의 가족 사항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반론의 여지는 있다. 즐겁게 먹고 마시다 보면 목소리가 좀 커질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관찰해보면 대부분 먹기는 해도 마시지는 않는다. 술 이야기다. 점심에 주로 찾아가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저녁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부러 둘러보면 식탁은 대개 단출하기 마련이다. 이제 20도 대마저 허물어졌지만 소주는 원래 한 병 360ml에 25도였다. 와인은 750ml에 13도 전후, 결국 와인 한 병이 소주 한 병이다. 개인차가 심한 게 주량이라지만 그 정도로 웃고 떠들려면 최소한 두 사람이 한 병 정도는 마셔야 한다. 하지만 그런 자리는 은근히 많지 않다. 그럼 분위기에 취해서? 덕분에 다른 손님의 분위기는 물론, 술로 지속을 위한 이익을 좇는 레스토랑도 망가진다. 최악의 일석이조다.

주량만큼이나 개인차가 심한 게 상식이지만, 사실 상식만 따라도 드레스코드는 크게 문제가 없다. 반바지를 언급했지만 어차피 장소불문 격식에 맞는 차림이 아니다. ‘남자는 가리고 여자는 드러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남자의 격식은 한 여름에도 긴팔 셔츠로 갖추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손님에게 불쾌함을 선사하지 않을 정도라면 큰 무리는 없겠다. 미슐랭 별을 단 레스토랑에서 등산화 차림의 손님을 본 적도 있다. 다만 예외는 존재하니, 등산화를 거부하는 레스토랑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전점검이 필수다. 홈페이지를 갖춰 놓는 레스토랑이라면 드레스코드도 확실하게 언급할 테니, 방문 전 확인할 것을 권한다. 어떤 경우라도 남자의 영원한 클래식인 감색 블레이저에 회색 바지 차림이면 충분하다.

드레스코드를 상식의 손에 맡겨도 괜찮다고 말하는 이유는, 레스토랑 경험의 격을 심각하게 떨어뜨리는 손님의 다른 만행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예약불이행, 즉 ‘노 쇼’다. 이보다 더 최악일 수 없다. 마음먹고 취재하지 않아도 SNS을 통해 듣는다. 예약을 위해서는 전화를 걸지만, 부득이한 사정이 생기더라도 취소 통보는 하지 않는다. 덕분에 다른 손님도 자리를 못 얻고 레스토랑은 재료를 날린다. 역시 최악의 일석이조다. 진짜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라면 그나마 양반이다. 크리스마스나 밸런타인데이 등의 대목에는 아예 복수로 예약하고 한 군데만 간다. 당연히 통보하지 않는다. 이를 개선해보겠다고 카드 회사가 행사를 하며 대신 예약금을 걸어주었더니 그 자리만 준수율이 0%인 레스토랑도 나왔다. 손님이라 불러주기도 아깝지만, 미국의 ‘오픈테이블’처럼 신용카드를 이용한 강제 선입금 제도의 시행은 요원해보여 더 안타깝다. 자발적인 참여? 어렵다고 본다. 이미 너무 멀리 갔다.

아, 현실을 파헤치다보니 진짜 테이블 매너에 대해서는 운도 떼지 못했다. 엄청난 건 없다. 예의실종이라 말했지만 우리의 밥상 예절은 엄격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다. 그 바탕이 탄탄하다면 위에 문화의 차이만 몇 가지 얹으면 끝이다. 코스마다 바꿔주는 경우도 많지만, 한꺼번에 차려놓은 경우라면 포크와 나이프는 밖에서 안쪽의 순으로 쓰면 된다. 한편 ‘칼질’을 할 경우 영국식(오른손 나이프, 왼손 포크 불변)과 미국식(포크가 자를 때는 왼손, 먹을 때는 오른손)이 다르다. 버터가 식탁 한 가운데에만 놓인다면 전용 나이프로 먹을 만큼 미리 접시에 덜어 빵에 직접 묻힌다. 그래야 함께 먹는 버터에 빵부스러기를 옮기지 않으며, 나이프로 계속해서 덜어 먹을 수 있다. 수프는 안에서 바깥으로 숟가락을 움직여 담고, 끝이 아닌 옆을 입에 대고 먹는다. 먹고자 하는 음식이 멀리 있는 경우라면 직접 몸을 뻗지 말고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달라고 요청한다. 보라, 의외로 간단하다.

-월간 <젠틀맨> 2013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