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에서의 마지막 밤
마지막 밤이다. 기대와 두려움과 아쉬움 가운데 어떤 감정이 앞서는지 생각하고 싶지만 솔직히 피곤해서 못하겠다. 또한 너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생각이 나를 망쳐왔다.
살 곳도 정해놓지 않고 들어가는 게 싫어서, 또 솔직히 말하자면 썩 나가고 싶은 생각도 없을텐데 집을 봐야 하기 때문에 나돌아다니는 게 너무 싫어서 어디에나 살 준비가 되어 있노라고 어머니에게 말씀드렸었다. 그러나 정말, 오산에서 살게 될 줄은 몰랐다. 고향인 수원보다도 더 이남에서 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 제안의 행간에 깔린 그 의도를 읽지 못했노라면 나는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물론 어머니도 마찬가지. 모두가 드러내놓고 인정하지 않지만 사실은 그런, 썩 좋지는 않은 간접의사소통 방식을 쓰는 피곤한 사람 아닌가, 알고 보면 똑같은 어머니와 나라는 사람은. 그래서 나는 오산까지 와서 살게 되었다. 물론 나에게도 명분은 있었다. 나는 진짜로 ‘글을 쓰려면 좀 쳐박혀야 되겠어요’라고 말했다. 자, 2년이 지난 지금 나는 정말, 쳐박혔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글을 썼을까?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소기의 성과는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정말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나갈 수 없기는 없었으니까. 이사해서 좋아하는 많은 것들이 지척에 있더라도 2년 동안 일궈놓은 생활의 패턴은 그대로 지키고자 한다.
어디에서든 떠날 때가 되면, 그 시간 동안 얻거나 잃은 것들을 돌아보게 된다. 단지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만 보냈던 순간들만을 되새김질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공간에서 보낸 시간의 전체를 돌아보고 또 들춰본다. 아직도 미약하지만 정말 글을 쓰게 되었다. 늘 급한 내가 생각하는 만큼은 나아가지 않지만, 그래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고 매일매일 할 일이 있다. 운도 좀 따라줘서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고, 또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내가 계획해둔 진화의 계획이 실현된다면 이 집은 아마 그 모든 것의 터전으로 기억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뭐, 거기까지는 너무 거창한 것 같다. 어쨌거나 내가 포기하지 않게 된 것만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지금의 이 상황에 절대 성공이라는 딱지는 붙일 수 없다고 생각하므로 여기에 살면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실패는 확실하게 기억될만한 굵은 놈들로 몇몇 확실히 건져서 떠난다. 마음이 아프다.
하필 집까지 다 구한 다음, 오산에도 광역버스가 들어왔다. 종전까지 고속버스였던 녀석들이 다른 동네로 가는 버스들처럼 빨갛고 파란색에 하얀 번호를 달고 처음 정류장에 나타났을때(사진 참조), 사실 나는 살짝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좀 어처구니 없는데, 본의 아니게 따돌림 당해왔던 것이 무리의 위장색으로 갈아입고 그 안에 편입되는 데에 대한 대견스러움이랄까 뭐 그런 종류의 감정이었다. 아 #발 우리 아들도 이제 양복입고 번듯한 회사 다녀, 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겠지만 어쨌든. 그리고 번호가, 그 번호로 표시되는 행선지가 여전히 차별을 조장하겠지만 뭐 그것도 어쨌든.
예전엔 딱히 떠올리지 않았는데, 다시 서울로 올라가려니 1999년인가, 처음 자취를 시작하기 위해 올라왔던 때가 생각난다. 수원에서 왔다갔다하는 오천원이라면 매일 고기를 사먹을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었다. 뭐 별 짐도 없었고 용달차에 책과 이불 같은 것들을 싣고 올라왔었다. 황학동인가에서 중고세탁기와 텔레비젼을 퀵으로 배달시켰고(둘 다 1년만에 망가져서 새로 사야만 했다), 언제나 비실거리다가 결국은 주저앉은 행어도 하나 조립했으며 아르네 야콥슨의 <구름>의자 카피한 것을 2만원에 들여놓았었다. 그동안 별로 나아진 건 없는데 물질만 잔뜩 늘어난 것 같아 삶이 잉여처럼 느껴진다.
뭐 그건 그렇고, 부모님이랑 떨어져 살려니 나도 좀 그렇다. 사실 5분 거리에 살면서 나는 그렇게 자주 찾아가지도, 찾아가도 오래 머무르지도 않기는 했다. 말만 앞서고 능력없는 불효자, 그게 바로 나다. 그래도 가까운데 살아서 뭔가 만들면 바로 가져다 드리고 이런 건 참 좋았다. 과연 또 돌고 돌아 그런 시간이 오기는 올까. 역시 사람을 가장 슬프게 만드는 건, 시간이다. 나는 또 그렇게 떠나간다, 거리를 두기 위해서. 그동안 미안하고 또 고마웠어요.
# by bluexmas | 2011/04/18 01:34 | Life | 트랙백 | 덧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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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 먹도록 제 구실 못한다고 생각하면 계속 채찍질을 하게 됩니다;;;
예전 집에 버리고 왔어야 할 것을 다 끌고 왔는데, 그러고나니 버릴거 뭐하러 끌고왔나 싶어서 또 막상 버리지도 못하고… 그러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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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힘든 하루였을테니 푹 쉬시고.. 새 집에서 좋은 꿈 꾸시길 바래요!
이사한 서울집에서는..
블루마스님께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정말 좋은 일 좀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이젠 서울에 사니까 다음에 또 올라오시면 제가 더 열심히 길라잡이 해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