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보의 하루
어제의 정신적, 육체적 피로에 찌들어, 정오가 되어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아침이어야했을 점심을 먹고, 머릿속에만 넣어두었던 일을 손으로 꺼내 서너시간만에 마무리를 지었다. 반찬을 만들어 먹으려다가 불앞에서 의욕을 잃고 참치캔과 옥수수로 볶음밥을 만들어 대강 넘겼다(맛은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아시안 게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금이든 은이든 솔직히 별 느낌은 없었다. 살면서 2등 한 번 못해보는 사람들도 꽤 많지 않던가.
업보에 쩔어 반쪽짜리 하루를 보냈다. 업보란 무엇일까. 뭔가 엄청 철학적인 고찰을 해야만 답이 나올 것 같지만, 사실 은근히 간단하다. 업보는 그저 나 자신이다. 사람은 원하지 않아도 스폰지처럼 세계사로부터 개인사에 이르는 온갖 말도 안되는 사건사고들을 흡수하며 형성된다. 어떤 것들은 자신이 자신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틀 속에 넣어 완성된다. 그랬다는 걸 깨닫는 시점에 이르면 고칠 수 있는 건 사실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괴로울 수 밖에 없다. 고칠 수 없는데 그게 바로 자기 자신이라서 괴로운 것이고 그게 바로 업보인 것이다. 업보는 업보이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서 끝을 보아야만 한다. 그래도 나는 내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니 내가 현재인 시점에서 이 업보를 끝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내가 과거인 시점에서는 이 업보도 함께 과거가 되어야만 한다. 내가 먼지가 된 다음의 현재에도 이 업보가 함께 현재라면, 내가 남기는 것은 결국 그저 죄, 그게 너무 극단적이라면 부담감이나 멍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게 바로 대를 물려 이어지는 업보인 셈이다. 그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아름다움을 담보로 추함의 존재가 정당화되어서는 안된다, 적어도 이 다음 세상에서는. 그 둘이 짝인 건 맞지만, 빛과 어둠처럼 반드시 짝으로 공존해야 될 필요는 없다.
# by bluexmas | 2010/11/16 00:17 | Life | 트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