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바랜 노란색을 띤 생명의 흔적

점심에 부쳐 먹으려고, 계란 두 개를 꺼냈다. 열 개 들이 한 상자에 들어있는 마지막 두 개였다. 그 상자의 계란에는 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껍데기의 색이 너무 옅은 것들이 있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바로 그 계란의 갈색에서 빛이 좀 바랜 듯한 뭐 그런 색이었다. 미숙아 같은 느낌이랄까, 뭐 그랬다. 마지막으로 남은 두 개 가운데 하나가 그랬다.

팬을 적당히 달구고 껍데기 색이 보통의 갈색인 것을 깼는데, 노랗다기보다 오렌지 색의 느낌이 더 강한 노른자가 탁 튀어나왔다. 그리고 껍데기 색이 옅은 걸 깼는데, 이건 허여멀건했다. 껍데기의 색이 바랜 바로 그 느낌으로 노른자의 색도 바래 있었다. 비교적 일찍 일어나서 꾸역꾸역 청소를 하고 배가 꽤 고픈 상태로 점심을 차리고 있었는데 순간 입맛이 반쯤 달아났다. 그래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대강 뒤집어서 다 부친 다음에 밥에 얹었는데, 반쯤 익은 노른자를 숟가락으로 터뜨리니 얘는 그냥 성의없이 표현하자면 가래의 느낌이고, 조금 성의를 보이자면 계란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의욕이나 의미 따위는 완전히 상실한 듯한 희끄무레한 느낌… 그렇지 않아도 아주 가끔, 계란을 먹는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신경을 쓸 때가 있다. 비교적 단단한 껍데기에 싸인, 하나의 완결된 생명체의 가능성을 파괴하는 행위가 영 마뜩찮은 것이다. 그건 어느 부위만 가공 포장된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사다 먹을 때에는 느끼지 못하지만 닭 한마리를 사다가 삼계탕을 끓일 때, 아니면 크게 토막쳐 파는 고등어 조각 몇 개를 사다 구울 때는 모르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먹을 수 있는 도루묵을 구울 때에는 왠지 쓸데없이 의식하게 되는 뭐 그런 느낌이다. 어쨌든 배가 너무 고팠으므로 그냥 밥을 꾸역꾸역 먹기는 했다. 게다가 유정란을 사 먹기는 해도 그것들이 병아리가 될 확률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졸렸지만 느린 노래가 듣고 싶었다. 공기는 눅눅할거라고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창문을 다 열어놓고 저런 노래를 들었다. 오랜만이었는데 그냥 어쩌다가 재작년 여름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오늘을 오늘처럼 살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죽을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그렇게 오랫동안 살 수 있을, 아니 살게 되거나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이를테면 빚은 갚아야만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냥 그렇게 사는 게 굉장히 자연스럽게 느껴졌던 여름이었다. 힘은 들었을지언정 포기하고 싶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팔을 휘감는 눅눅한 공기에 적당히, 무난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램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물론, 누구나 다 아는 노래를 듣고 있었으므로 그 감정이 그렇게 특별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뒤로 참 많은 것이 변했다. 그 많은 것들 가운데에는 굳이 변할 필요가 없는 것들도 꽤 있기는 하지만 그게 뭔지 하나하나 헤아리다 보면 어째 더 아쉬워하게 될 것 같아서, 누가 물어보면 뭐 그런 것이 있다고만 얼버무리고 더 이상 대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 눈치가 없어 끝까지 그게 뭐냐고 캐묻는 사람을 만나면 삶이 재작년의 그 여름으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지난 일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던 어느 기간 동안의 삶이 꽤나 구차한 느낌으로 다시 다가온다. 다들 가끔 그런 느낌도 드는 걸까요? 라고 물으려는데 내 차례는 이미 지났다고 했다. 기회를 다시 달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여태껏 충분히 구차하게 살았다.

 by bluexmas | 2010/07/06 02:39 |  | 트랙백 | 덧글(12)

 Commented by Semilla at 2010/07/06 03:29 

저는 생명에 대한 생각 없이 그냥 맛나게 먹는것에만 치중해왔는데

전에 홍콩인 친구 데리고 한인식당에 가서 알찌개를 시켰더니 친구가 그렇게 많은 생명을 죽인다고 생각하니 껄끄럽다고 말해서 (그 친구는 육개장을 시키더군요) 그 때 처음 ‘알’도 그렇게 볼 수 있구나 했어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07 00:49

그건 개인 취향이라서 참 함부로 말하기가 힘들죠… 어떻게 보면 알이나 소나 다 거기에서 거기일 수도 있구요. 생각 안 하기도, 그렇다고 하기도 쉽지 않은 그런 문제입니다.

 Commented by 루아 at 2010/07/06 03:45 

가끔씩 이런 자각 하는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현대인 (혹은 도시인) 의 대부분이 자기 음식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고 사니까요… 아니, 수퍼마켓에서 온다고 착각하고 살려나;; 게다 푸른 초장에서 뛰어놀던 소랑 돼지가 밥상에 오른다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은 착각이지만.

다른 생명에 – 풀이건 고기건 – 의존하여 살아가는 생명체로서, 음식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다 죽어 내 밥상에 오르는지 정도는 아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이자 도덕적인 소비가 아닌가 합니다. 이제 와서 지구 인구 전체가 텃밭 일구고 유기농 가축 도살할수는 없지만 말이에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07 00:50

특히 미국에서는 다 깔끔하게 포장되어 나오니까 사람들이 잘 모른다고 하더라구요. 그것도 교육이 필요한 문제이지만 정말 먹고 살기 빠듯한 사람들에게 놓아서 기르는 달걀 먹고 그러라는 건 일종의 사치겠죠.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아리난 at 2010/07/06 04:14 

노래 좋네요ㅎㅎ 세상엔 역시 참 많은 음악들이 있네요.

오늘 머핀도 너무 맛있었고 오랜만에 반가웠어요ㅎㅎ

성북구에서 모이시게 되면은 시간 맞으면 또 놀러갈께요ㅋㅋ 기회되면 또 뵈요!ㅋ

책 너무 잘 읽을께요. 그래도 오늘 나름 주선자이시라 신경쓰셨을텐데 푹쉬세요- ㅎㅎ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07 00:51

네 저도 잘 아는 밴드는 아니지만… 뭔가 그때 와주셨던 분들을 뵈면 “원년 멤버” 만나는 기분이랄까요?^^ 다음에 기회 닿으면 또 뵙구요~

 Commented at 2010/07/06 08:1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07 00:55

네, 오는 길에 양재동 하나로 마트에서 장도 봤어요^^ 물건 좋던데요. 차돌박이랑 삼겹살도 샀습니다~저도 뵙게 되어 너무 반가웠습니다. 머핀을 맛있게 드셨다니 기쁘네요.

 Commented by 홈요리튜나 at 2010/07/06 16:37 

나 하나가 생존하기 위해선 많은 것이 희생되어야 하니…그렇기에 그들의 몫 만큼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걸까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07 00:55

아 그게 정말 맞는 말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Commented by cleo at 2010/07/06 23:13 

아이슬란드에서 가졌던 투어필름이자, 다큐멘터리 < Heima > DVD로 가지고 있어요^^

보면서 내내 ‘아이슬란드에 가고싶다’고 노래를 불렀답니다.

블루 라군에 가서 몸을 담그면 영혼의 상처조차도 다 치유될 것 같기도 하고…-.-

블루마스님 블로그에서 ‘시우르 로스’ 음악 들으니깐, 무척 반가워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0/07/07 00:56

저도 그 DVD를 보고 여행 가고 싶다 했는데… 결국 아이슬란드보다 그냥 옆동네 나라들을 다녀왔습니다. 그 나라는 요즘 망해서 남의 상처 달래줄 상황이 아닌 것 같더라구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