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사이 삽질 여행기(4b)-평원의 벽과 한 밤의 폭식
나는 단 1초라도 빨리 내리기 위해 기차가 채 역에 멈춰 서기도 전에 맨 앞 출구로 다가섰다. 기차가 멈춰서자마자 운임을 내밀었으나 운전하던 차장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만 할 뿐, 나를 내려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절차가 필요한 모양인데, 내가 그걸 무시한 것 같았다. 나는 그냥 고개를 숙이며 마이바라까지 끊었던 기차표와 천 엔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그는 그 돈을 기차에 붙어 있는 동전교환기에 바꾼 다음 칠백 엔 조금 넘는 것으로 기억하는 돈을 가져가고는 나를 내려주었다. 플랫폼에 지붕이 달린 의자 한 칸이 달랑 있는, 그런 간이역이었다. 그나마도 이 역은 다른 역보다는 큰 편이었다.
무슨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오오자키까지 돌아오는 표를 미리 샀다. 우리나라에서 1980년대에 주요역에만 설치되어 있던 표 자동판매기와 똑같은 것이어서, 아직도 이런 걸 쓰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지금은 뭐 삼성이 소니보다 더 잘 나가게 어쩌네 해도 일본이라는 나라의 기술이 뛰어난 것은 사실인데 그래도 바꿀 필요가 없는 건 안 바꾼다는 생각이 들었고, 솔직히 그게 부러운 구석이 있었다.
역사를 나서서는, 그쪽이라고 짐작되는 방향으로 거의 뛰다시피 걷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뛰어가야겠어…까지 호들갑을 떤 건 아니고 ‘아니 대체 너 따위가 뭐길래 나를 여섯 시간이나 걸려 여기에 오게했는데 1초라도 빨리 실물을 확인해야 되겠다’의 기분이었다. 약간 무리한 비교지만 사진에서 어렴풋이 보고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뭔가 희미한 느낌이 있는 여자가 계속해서 안 만나주겠다고 했다가 결국 만나게 되는 날 약속장소에 가면서 느끼는 어떤 초조함이라고나(그러나 좀 무리한 비교이기는 하구나-_-;;;)…
그저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차는 그럭저럭 지나다녔지만, 사람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중간쯤에서 어떤 아주머니와 마주쳤는데, 정말 공손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이곳이 그런 곳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눈 앞 아파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보려는 세지마 가즈요의 아파트는 1단지, 그 옆은 2단지인지 먼저 눈에 들어온 2단지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주변은 모두 오래된 저층 아파트나 주택이었는데, 이 단지만 한 가운데에 떡허니 높이 솟아 있어서 그 느낌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게다가 단지 안에 들어서자 날씨 때문인지 바람이 쌀쌀하게 불었고, 굉장히 을씨년스러운 느낌이었다. 특히나 세지마 가즈요의 아파트는 기나긴 편복도형이라서 더 그렇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건축가가 디자인한 각각의 아파트들은 모두 “벽”의 느낌이 강하게 들도록 대지의 가장자리를 싸고 서 있었는데, 단지 바깥쪽의 사람들에게도 그렇겠지만 안쪽에 사는 사람들도 그렇게 편안한 기분은 들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에게는 와보고 싶었던 건축물이지만 여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집에 지나지 않을테니, 나는 무엇보다 건축물을 보고 싶은 내 행동이 이 사람들의 주거 평화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움직여 세지마 가즈요의 단지에 올라 건물을 둘러보았다(암스테르담이었나 위트레흐트였나… 하여간 MVRDV 디자인의 어느 개인 주택에 갔었는데, 전면부 큰 창의 꼭꼭 닫아놓은 커텐 안쪽에서 엿보이던 주인의 못마땅한 눈길이 아직도 기억난다). 아파트는 10층짜리 높은 아파트는 구불구불 긴 하나의 벽이었지만, 그 유니트의 폭이 굉장히 좁아서 수직이동을 위해 계단을 오르면 사진으로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더 불안정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적당한 지점에 엘리베이터가 있기는 해도, 계단은 오로지 불규칙적으로 놓여 있는,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길게 뻗은 것들 뿐이었고 바람이 쌩쌩 부는 날 이런 계단을 쭉 올라 꼭대기까지 오르는 건 참으로 무서웠다. 사실 이 아파트에서 가장 좋아했던 요소가 바로 이 계단이었고, 그래서 가능할 때마다 이 요소를 집어넣곤 했었는데 어떤 경우에 그 느낌이 생각보다도 즐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걸 아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하는 기분도 좀 들었다). 어떤 큰 건물들의 경우, 실내에 이런 요소를 넣고 그렇다면 별 느낌이 없지만, 그렇지 않았음에도 정말 부실하게 달려 있는 느낌을 주는 이 계단을 오르는 건 정말 만만치 않았다. 결국 꼭대기 층까지 올라갔지만, 내려올 때에는 그냥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렇게 위에서 올려다 본 주변은 그저 낮은 평야여서, 과연 여기에 이런 아파트를 짓는 것이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다시 궁금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만약 기회가 생긴다면,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자료를 모아 다시 글을 쓰도록 하겠다… 이렇게 말만 해놓고 쓰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기는 하지만;;;). 그런 기분은 아파트 단지 바로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공동묘지를 맨 꼭대기층에서 내려다보고 나서 아주 강해졌다. 결국 나는 더 이상 촉각을 곤두세워 건물을 볼 일종의 탄력 같은 걸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냥 모든 것이 귀찮게 느껴졌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아파트는 사진을 찍기에도 너무 힘든 종류의 건물이었다. 초광각렌즈가 있기는 했지만, 제대로 사진을 찍으려면 한참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야만 할텐데, 그러기에도 귀찮았다. 꼭 사진일 필요는 없었다. 계속해서 사진만을 찍어 남겨야 된다는 강박에 자신을 맡기면, 결국 정말 건물을 보거나 느끼지는 않게 된다. 그냥 적절한 선에서 접기로 했다.
그 나머지의 아파트에는 큰 관심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주변을 한바퀴 죽 돌면서 적당히 사진을 찍고, 또한 적당히 건물을 들여다 보았다. 전부 한 시간 정도를 돌고 나니 배도 고프고 의욕도 완전히 사라졌다. 저 멀지 왠지 양판점일 것 같은 느낌을 풍기는 건물이 있어서 가보았더니 거대한 수퍼마켓이어서, 오니기리를 파는 가게에서 뭔가 튀김이 들어간 걸 두 개 사서는 그 앞 의자에 앉아 점심으로 먹었다. 이 때가 세 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튀김은 알고 보니 새우였는데, 굳이 튀김 옷을 쌀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수퍼마켓이 엄청나게 커서 돌아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건너 뛰었다. 다시 단지 쪽으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아파트를 눈에 담고, 다시 역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올때보다는 조금 느린 걸음이었지만, 그래도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굳이 같은 길을 택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조금 다른 길을 적당히 걸어 역에 돌아오니 기차 시간까지는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잠시 대합실에 앉아 현상수배범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다가, 플랫폼 벤치로 자리를 옮겨 기차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의자가 한 쌍씩 앞으로 달려 있는 현대적인 기차였고, 각 역마다 학생들이 조금씩 탔다. 그냥 이러한 과정 자체를 조금 더 즐길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느꼈다. 언젠가 이곳에만 머무르러 다시 돌아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는 이 열차를 타고 끝까지 가보면 더 좋을 것이다. 그 끝에는 온천이 있다고 들었다.
역에 도착한 시간은 4시 1분, 시간표를 미리 확인해서 마이바라 행 열차가 10분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기타가타에서 기차에 몸을 싣자마자 서두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단 대합실로 나가서 열차 표를 다시 사가지고 와야 되기 때문에, 나는 마음이 급했다. 목적을 이뤘으니 단 1초도 허비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낯익은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열차가 다시 오오자키 역에 들어서자, 역무원이 나와서 표를 한 장씩 나눠 주었다. 이걸 내고 밖에 나가서 표를 사가지고 다시 돌아오면 되는 모양이었다. ‘고베 치켓토 오네가이시마스’를 외치자 여자 역무원은 신칸센이냐 아니냐를 물었고 나는 ‘노 신칸센’을 외쳐 표를 받아들고, 플랫폼에서 기다리던 오오자키 행 열차를 탔다. 어차피 JR을 타야 되니까 고베까지 쭉 가서 저녁을 먹고, 케이크를 사가지고 돌아오면 될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 열차는 잘 연결되어, 오오자키에서 바로 고베를 향하는 신쾌속을 탈 수 있었다. 그 열차에 몸을 싣자 조금 긴장이 풀어졌다. 그러나 잠은 잘 오지 않았다. 사실 이렇게 변수가 많질 수 있는 여정이라면 여행 마지막 날 보다는 그 전날 정도에 하는 것이 계획이 틀어질 경우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좋은데, 그 전날에는 꼭 빛의 교회를 보러 가야만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일단 계획대로는 모두 이루어진 여행이었다.
표는 고베까지 끊었지만, 다시 산노미야에서 내렸다. 밤이었는데, 일단 목표는 저녁. 다시 한 정거장을 걸어 지난 번에 문을 닫아 들르지 못했던 경양식집 ‘L’Ami’에 들렀다. 바로 옆자리에만 앉았다면 주방에서 뭘 하는지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을텐데, 주방이 잘 보이는 자리에는 20대로 보이는 여자 둘이 앉아 있었다. 소문에 한신 타이거스의 경기를 보기 위해서 호텔을 나와 식당을 차렸다는, 50대 후반에서 60대로 보이는 주방장과, 40대 초 중반으로 보이는 다른 한 사람, 이렇게 두 사람이 음식을 만들었다. 소문의 그 계란을 만드는 광경은 보지 못했지만, 밥을 만들어서 틀에 넣어 접시에 담는 광경을 지켜볼 수는 있었다.그리고 드디어 받게 된 바로 그 오므라이스. 오므라이스라는 걸 안 먹어본지 너무나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정말 먹고 싶었다. 아니면 두 번씩이나 올 생각은 안 했을 듯… 밥도 고슬고슬하게 잘 볶았고, 재료들도 잘 익었으며 간은 좀 싱거웠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는데, 바로 그 계란은 정말 겉만 익힌 탓인지 즐겁게 다 먹고 가게문을 나서 다이마루 백화점까지 가는 동안 입 속에 계란비린내를 생각보다 진하게 남겼다. 일본에는 아직도 날계란에 밥을 비벼먹는 사람이 많아서 계란의 유통기간이 단 하루라던데, 이게 계란이 싱싱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단지 너무 많은 계란을 모아 그저 조금 덜 익혀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계란 비린내는 옥의 티였다.
그래도 저녁을 만족스럽게 먹었으니, 다시 한 번 케이크에 몰입할 때. 다시 다이마루 백화점의 식품매장에 들러 지난 번에 들르지 않았던 매장들에서 케이크를 하나씩 사고, 단 한 군데 있는 매장에서 마카롱도 샀다. 빵도 좀 사고 싶었지만, 백화점 지하매장 밖에 있는 폴에서 잡곡빵을 하나 산 것 말고 밖에서는 어디에 가야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다이마루 백화점에서 대각선으로 건너편에 있는 ‘이스즈 베이커리’는 안내책자에도 나오는 곳이지만 나는 그런 안내책자에 나오는 음식점들을 믿지 않는데다가, 혹시나 해서 들어가 뒤적거린 식빵의 성분목록에서 ‘유화제’를 보고 나서는 미련없이 가게를 나섰다. 사십 몇 년 전통이라고 해도 유화제라면 관심을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고베까지 가는 표를 끊었는데 그 전 역에서 내려서 그런지, 표는 개찰구를 빠져 나왔고 나는 영문도 모른채 그 표를 가지고 기차를 다시 타서 JR오사카 역으로 다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맨 뒷칸에서 유니폼을 답답해 보일 정도로 빈틈없이 차려 입은 여자 운전수가 잠긴 목을 쥐고 안내방송과 운전을 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 물좀 한 모금 마시지…
개찰구에서 걸리기는 했지만, 직원은 ‘오사카’라는 작은 도장을 표에 찍어주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되면 오사카까지 돌아오는 운임을 아낀 셈인가…? 어쨌든, 다시 우메다 역 지하의 수퍼마켓에 들러 프로슈토와 북해도산 치즈를 사서 호텔로 돌아와서는, 짐을 놓고 주변을 잠시 돌아다니다가 호텔 맞은 편의 로손에서 첫날 밤에 마신 것과 같은 포도주(이번에는 메를로)를 사가지고는 프로슈토와 빵, 치즈를 같이 먹은 뒤, 지금은 몇 쪽인지 사진을 봐야 간신히 기억할 정도의 마카롱과 크림 카라멜, 티라미스를 비롯한 각종 케이크를 먹다가 잠이 들었다. 이 밤의 끝이 정확히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이제 전혀 거의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날, 돌아오는 길에는 Sun Kil Moon을 들었다. 앨범을 처음 샀던 게 2008년 봄에 뉴욕 여행을 갈 때였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아직도 다 듣고 있지 못하고 있다. 처음 몇 곡은 좋지만, 듣다 보면 지루해진다. 마크 코즐렉도, 그의 목소리도 좋아하지만(공연을 본 적도 있다), 레드 하루스 페인터스나 선 킬 문 모두 모든 곡들을 듣지는 못한다. 이 날 저녁에는 그의 노래들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기는 했다. 특히 앨범 처음에 나오는 바로 이 노래.
# by bluexmas | 2010/03/27 17:03 | Travel | 트랙백 | 덧글(29)
저도 그런 생각 많이 하니까 괜찮습니다. 사람들은 또 남자가 그런 걱정하면 더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갠적으론 아파트보다는…빨간 우체통과 오래된 표파는 기계가 더 정감가고 좋네요…
우체통도 표파는 기계도 너무 정감가죠 정말…
빨려들어갈 듯이 사진들을 보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
저 현상금 포스터는 뭔가 비현실적이에요.
그래서 bluexmas님이 저기 계셨다는 사실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
….아 맛있어보여 T_T
마침 오늘 읽은 책에서 르 코르브지에의 사부아빌라가 실은 엄청 습기차고 비가 새고 살기 어려워서 그곳에 살던 사부아 부부의 아들이 폐에 물이차서 일년동안이나 요양해야했고, 나중엔 사람이 살수 없는 곳이라고 는 항의를 했다는 글을 봤거든요. 학교다닐때 좋은 디자인의 건축이라고 배웠었는데 말이죠;;;; 디자인적으로는 좋은 건축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라는걸 알고 깜짝 놀랬어요-.- 보기에도 좋고 쓰임에도 좋아야 된다는거 어려운것같아요.
저 빌라 사부아에도 갔었는데. 코르뷔지에도 사실 너무 에고가 강하셔서 참 주변 사람들이 고생했을 것 같아요…;;;
천만엔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http://www.taimeiken.co.jp/menu/index1.html
일본인들은 날계란을 풀어서 샤부샤부나 꼬치구이의 소스로 쓰기도하고, 덮밥류에 살짝 설익은 계란도 많이 들어가는만큼 이런 오무라이스도 잘먹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