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에 충실한 빵, Paul & Paulina
요즘 같은 세상에 ‘기본이나 잘 해라’ 라는 얘기가 우습게 들리겠지만, 실제로 해 보면 안다. 그 기본이라는 걸 잘 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왜 뜬금없이 기본타령으로 글을 시작하냐면, 빵만들기만큼 기본이 중요하지만 잘 안 되는 것도 드물기 때문이다. 빵은 좀 불쌍하다. 일본의 영향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빵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팥이나 소시지, 심지어는 케찹이나 치즈 따위를 위해서 존재하니까. 아직도 빵=간식, 이라는 인식 때문에 기본이 아닌 이런 빵들은 많이 발달했지만 거꾸로 기본이며 밥 대신 먹을 수 있는, 밀가루, 물, 효모, 그리고 소금의 기본재료로만 만드는 빵-소위 말하는 ‘artisan bread’-은 제대로 된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게 간식으로 먹는, 온갖 달고 짠 것들이 들어간 간식빵이 대세라 그런지, 밥 대신 먹을 수 있거나 양식당에서 곁들이로 먹을 수 있는, 좋은 의미에서의 하얀 도화지와 같은 빵을 찾아보기란 은근히 쉽지가 않았다. 밀가루, 물, 효모, 그리고 소금으로만 만드는 빵은 어느 나라의 빵인지를 막론하고 빵만들기의 기본이지만, 재료의 간단함 만큼 좋은 빵을 굽기란 그렇게 쉽지가 않다.
사실, 재료의 간단함에 반비례에 이런 기본빵은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빵만들기가 생각보다 많은 인내심과 섬세함을 요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모두 아는 것처럼, 빵에는 효모(이스트)가 들어가는데, 이것은 생물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생물이지만, 좌우지간 생명체라는 얘기다. 효모는 열과 당분에 반응하여 빵의 조직(=식감)과 풍미를 책임지는데, 이 효모는 제대로 다루는 것이 참 쉽지 않다. 일단 온도에 굉장히 민감해서 너무 낮은 온도에서나 높은 온도에서는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않거나 죽어버리기 때문이기도 하고, 조금만 발효의 시기를 넘겨도 지나치게 발효가 되어 빵에 필요 이상으로 신맛이 돌게 되기 때문이다.
수백만 가지의 달고 짜고 신 간식빵을 만드는 제빵회사들의 기본빵인 식빵이 정작 맛이 없는 이유는, 섬세함은 어느 정도 지킬 수 있지만 인내심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환경면에서는 큰 회사들이 가장 우월할 것이다. 온도며 습도 등등을 완벽하게 기계로 통제해서 발효에 적합한 환경을 유지할 수 있을테니까. 그러나 대량생산되는 식빵은 수요를 대기에 바빠서, 빨리빨리 태어나야만 한다. 반죽을 해서 한 시간 또는 그 이상을 들여 1차 발효를 하고, 내부의 가스를 빼고 또 2차 발효를 할 시간이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대량생산되는 식빵은 정확하게 통제되는 환경에서 산화제(oxidizer)를 써서 불과 4분만에 1차 발효를 끝내고 잠시 2차 발효를 시켰다가 굽게 된다(주1). 그리고 이스트는 그 특유의 향과 풍미를 더하는 차원에서 쓰이게 된다.
물론, 이게 정확하게 우리나라의 빵공장에서 벌어지는 공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어디에서나 살 수 있는 식빵은 대량 생산과 장기 유통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넣지 않아도 될 첨가물들이 많이 들어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어쨌든, 우리나라 빵의 세계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재료에다가 인내심과 섬세함만으로 구운, 바게트나 소위 말하는 ‘peasant loaf’ 와 같은 기본 빵을 제대로 먹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집에서 어느 정도 흉내를 내는 것도 가능은 하지만, 발효와 굽는 과정의 온도를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통제하기 어려운 환경에서는 결과물도 의욕만큼은 나오지 않기 마련이다. 그래서 빵만들기의 기본을 지키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이 너무 길어졌는데, 그래도 요즘 쓸데없이 장난을 안 치고 먹을만한 빵을 만드는 빵집이 많아져 살기가 조금 여유롭다는 생각이 드는 가운데, 홍대 앞의 ‘Paul & Paulina’ 가 그런 빵에 치중한다는 얘기를 듣고 들러 빵을 몇 번 사다가 먹어보았다(먹기 전에 사진을 많이 찍은 줄 알았더니, 별로 없다. 먹기 바빴던 듯-_-;;;).
처음 먹었던 빵은,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Peasant Loaf(미식축구 공을 엎어 가로로 반 가른 모양. 다른 이름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을 찾아봐도 보통 ‘Rustic Bread’ 와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 뭐 말하자면 촌 빵이라는 얘긴가…)였다. 내가 좋아하는 빵의 식감은 보통 겉(Crust)은 질기지 않지만 큰 부스러기가 떨어질 정도로 바삭하고, 속(Crumb)은 아주 약간 마른 듯한 느낌을 주면서 살짝 질긴 정도. 이 빵은 속은 그런 느낌이었으나 겉은 바삭거리지 않고 질긴 편이었다. 그러나 그 느낌이 위에서 장황하게 늘어놓은 그 기본적인 빵의 느낌에 충실하다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일단 좋은 느낌으로 통과.
두 번째로는 덩어리 식빵(봉지 사진만 남았다…-_-;;;)을 먹었는데, 이 식빵은 흔히 말하는 ‘닭가슴살처럼 쭉쭉 찢어지는 결’ 을 가진 식빵은 아니었다. 식빵치고는 공기 구멍들이 좀 큰 편이고 따라서 식감이 좀 성글다. 사실 집에서 아무리 식빵을 구워봐도 어딘가에서 사는 그런 식빵들처럼 쭉쭉 찢어지는 결을 가진 건 만들 수 없어서, 대체 비결은 뭘까 궁금하게 생각했는데 이 빵을 먹고는 이렇게 구우면 그런 결은 가질 수 없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냥 먹기보다는 구워먹는데 더 잘 어울리는 식빵이었다. 나는 흡족하게 먹었는데, 거듭 말하지만 닭가슴살을 닮은 식빵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근처 미루카레의 식빵을 사면 될 듯.
그리고 며칠 전에 홍대 앞에 갔을 때에는 바게트와 치아바타를 함께 샀다. 정확하게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바게트를 즐겨 먹는 편은 아닌데, 진열대에 좀 많이 구워서 진한 갈색을 띠고 있는 바게트를 보니 한 번쯤은 먹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치아바타는, 여기에서 만드는지도 몰랐는데 몇 군데에서 먹어본 치바아타가 너무 치아바타스럽지 않아서 불만족스러웠던 차라 ‘그래 너는 좀 어떤거냐?’라는 기분으로 산 것이었다. 바게트를 샀을 때에 치아바타는 떨어졌고 한 시간 있어야 나온다고 해서 시간을 보내러 다른 곳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무슨 파리에서 길 걸어다니면서 갓 나온 바게트 먹는 분위기라도 한 번 내보겠답시고 빵을 뜯어 한 입 물었다가 굉장히 놀랐다. 그 느낌이 내가 처음 샀던 Peasant Loaf에서 기대했던 딱 그런 종류였기 때문이다. 부서지는 겉껍데기, 그리고 그와 대조했을 때에 상대적으로 더 부드럽게 느껴지는 속… 그러나 솔직히, 이 정도의 색이나 식감이 날 정도까지 구웠다면 바게트로는 너무 구운 것이 아닌가 생각은 들었다. 바게트도 그렇고 치아바타도 그렇고, 이 정도로 구운 것과 하얀 색이 전체적으로 전혀 가시지 않을 정도로만 구운 두 가지 종류를 파는데 아마 그건 이 정도로 겉이 딱딱한 빵을 좋아하지 않는 다수를 위한 전략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양 극에 놓인 두 가지를 만듦므로써 최적의 중간 상태로는 빵을 만들지 않는다니, 조금은 모순이라고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리고 치아바타는, 사온 다음 날 아침에 먹으려고 반을 갈랐는데 사진에서처럼 커다란 구멍을 보고 먹기도 전에 만족했다. 저만하면…
어째 먹은 빵에 대한 느낌을 늘어놓다 보니 식감쪽에 너무 치우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 제대로 만든 빵은 맛이 어떤가? 나같은 얼뜨기가 집에서 흉내낸 것이 아닌, 그 모든 비율과 온도, 그리고 시간을 잘 지켜 구운 빵은 우리가 늘 빵이라면 예상, 또는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밀의 구수한 풍미를 강하게 풍긴다. 빵 얘기를 하는데 계속 밥을 들먹이게 되는데, 맛있는 쌀로 잘 지은 밥에서 나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구수한 냄새와 맛과 어느 정도 닿는 부분이 있다고나 할까? 뭐 밀가루로 만든 빵이면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생각할 사람도 많겠지만, 차이점이 안 느껴진다면 굳이 그렇게 신경써서 빵을 만들 필요도 없지 않을까 싶다.
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빵집의 시식인심은 정말 후하다. 가보면 늘 적어도 네다섯가지 이상이 시식용으로 나와있는데 그것도 아끼지 않고 큼직큼직하게 썰려 있으며 찍어먹을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 기름도 함께 있다. 그리고 왼쪽 벽에 붙은 바(또는 탁자)에는 항상 얼음물이 있는데, 일회용 컵도 아닌 유리컵이 함께 놓여있다. 나는 그런 걸 보면 세심하게 손님을 배려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몇 번, 빵을 사러 들렀을 때 맨 앞에서 손님을 맞으시난 여자분과 얘기를 나눴는데, 정확하게 가르친다는 표현을 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간식빵과는 다른 빵의 세계를 알리려는 의지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따라서 후한 시식도 그런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고(물론 오해가 없도록 덧붙이자면, 일하시는 분들은 굉장히 친절하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데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차원에서 후한 시식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먹어봐야 맛을 느낄 수 있고, 또 이런 빵이 손쉽게 살 수 있는 대형 체인 빵집의 빵과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으니까. 별로 만족스럽지 못했던 치아바타에 대해서도 농담처럼 얘기를 나눴는데, 아직은 사람들이 그런 종류의, 겉 껍데기가 딱딱한 빵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시는 걸로 보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런 종류의 빵이 사람들에게 많이 파고들지 못한 것일까, 하는 의문도 아울러 가지게 되었다. 조금만 찾아보면 주변에 빵 구워 먹는 사람들이 많던데, 다들 어떤 이유에서 집에서 빵을 구워먹는 것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가격에 대해서는 조금 불만이 있다. 내 손바닥만한 치바아타 하나에 이천 오백원이라면 결코 만만한 가격은 아니니까. 그러나 빵을 먹어보고, 또 바로 앞에 보이는 빵 만드는 과정이나 이런저런 것들을 보면 그래도 수긍이 간다. 그냥 ‘빵’ 보다는 ‘빵님’ 이라고 불러야만 할 것 같은, 프랑스에서 수입한 유기농 밀가루로 만들었다는 비싼 빵 따위마저 영접해본 바, 돌아와서 지난 육 개월 동안 먹었던 빵들 가운데에서는 폴 앤 폴리나의 빵이 가장 맛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식단도 많이 서구화되었는데, 이왕 서구화될 거라면 좀 바람직한 방향으로도 가서 이런 종류의 빵집도 좀 많이 생겨 가격이나 접근이 쉬웠으면 좋겠다. 빵부터 시작해서 고로케랑 찹쌀떡까지, 백만가지 한꺼번에 만드는 빵집은 좀 말고. 물론 쉽지도 않지만 대체 기본이라는 게 지켜지지 않으니 가장 기본적인 빵에 이렇게 많은 얘기를 늘어놓고야 말았다.
* 주1: Harold McGee / On Food and Cooking
또 다른 책(Peter Reinhart / The Bread Baker’s Apprentice)에서 빵 보관하는 법에 대해 찾아보았다.
1. 지방이 들어가지 않은, 겉이 딱딱하고 부드러운 빵의 경우에는 만들어서 그날 먹는 게 가장 좋고, 하루 이상 보관할 경우에는 플라스틱 랩으로 완전히 감싸서 보관하는 게 좋다고 한다. 나는 무슨 빵 담는 비싼 통 같은 걸 생각했더니, 예상외의 얘기다. 어쨌든 이렇게 싼 다음 얼리거나, 소위 말하는 ‘건냉소’ 에 보관하는 게 좋다고.
2. 말랑말랑한 빵의 경우에는 많이 쓰는 비닐 주머니 같은 데에 넣어서 역시나 얼리거나 건냉소에 보관. 직사광선에 노출되면 빵의 물기 때문에 곰팡이가 슬게 된다고. 사실 썰어서 파는 식빵 같은 경우에는 봉지채 냉동실에서 얼렸다가 먹을 만큼만 꺼내서 녹히거나 토스터에 구워 먹으면 된다. 그럴 경우 최소한 두 시간 전에는 꺼내놓는게 좋고. 종이 봉지에 넣어서 물을 뿌려 오븐에 데우는 방법도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오븐을 늘 쓰지는 않으니까 생략.
한편, 자주 인용하는 해롤드 맥기의 책에서는 냉동할지언정 냉장은 하지 말고, 차라리 상온에 보관하는 것이 빵맛에는 좋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럴 경우 빵 보관용 상자나 종이 봉투에 넣어 어느 정도 ‘숨을 쉬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냉동할 경우에는 토스트나 어떤 방법의 재가열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참, 몇 번에 걸쳐 발효와 통밀빵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발효의 경우 보통의 이스트를 쓰는데 적은 양을 쓰고 장기간 천천히 발효시킨다고 하고, 통밀빵은 시험중에 있다고 한다. 요즘 내가 만드는 통밀빵에 점수를 그렇게 후하게 주지 않는 편이라, 제대로 된 통밀빵을 먹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 by bluexmas | 2009/09/11 10:02 | Taste | 트랙백 | 덧글(22)
프랑스 수입 유기농 밀가루라면 김영모가 제일 먼저 떠오르네요. 김영모베이커리는 럼시럽 뿌린 몽블랑이 맛있었는데..
맨 위 바게뜨 사진이 많이 구운 버전의 바게뜨 맞죠? 살짝 오버쿡(제빵도 이용어를 쓸까요..)된 느낌이긴 하지만 끌리느느 모양새네요 ㅎㅎ 홍대 자주다니는 동생에게 한번 부탁해 먹어봐야겠습니다 :
김영모가 프랑스 유기농 밀가루를 쓰는지는 몰랐네요. 한때는 거기 빵도 많이 먹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좀 조잡하다는 느낌이지만 빵은 맛있죠^^;;; 제가 글에서 말하는 빵집은 압구정동의 모 빵집이에요.엄청 비싸죠.
빵이니까 아무래도 오버베이크라는 말을 쓰겠죠? 단순하지만 정말 빵맛이니 한 번 드셔보세요^^
빵 만드는게 생물을 다루는 일이라는 건 처음 생각해 본 것 같아요:D
미루카레 빵들도 좋아하는데…ㅋㅋ 조만간에 또 홍대 출동해야 ㅠ
맛있다고 소문난 그 곳의 빵 맛이 너무 궁금합니다.
( 제 세례명 ‘Paulina’ 라서 더더욱…ㅎㅎ )
‘밥보다 빵’이 주식인 저로서는.
홍대앞이 아니라…하다못해 서울에라도 산다면,
거의 매일 들러서 빵 사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유익한 글 잘 읽고 갑니다^^
집에 오븐이 있다면 제가 올린 반죽 레시피로 한 번 빵을 구워보세요. 별로 어렵지 않거든요~
비공개 덧글입니다.
물론 갑자기 받는 게 훨씬 더 즐겁기는 하죠^^
빵을 보니 바로 알아보겠네요.
기대했던 식감이 아니었지만 빵자체는 참 맛있었지요.
요기 빵- 전 패션파이브가 가까워서 거기 빵만 지치게 먹는데, 여기 얼마전부터 독일스페셜이라며 호밀빵들이 대거 출시되었어요. 이태원 나오시면 한번 시식해보세요. (전메뉴시식! )
치아바타라면, 이태원의 트레비아 에서 파는 치아바타도 맛있어요. (순전히 이태원에 살기때문에;)
음, “쫄깃한 치아바타” 라는 이름을 따로 만들어야 될 것처럼 쫄깃/질깃해요.
근데 그게 참 은근 맛있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