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케잌
컵케잌을 먹었다. 고백하건데, ‘아 난 정말 컵케잌을 먹어줘야 되겠다’ 라는 생각으로 먹은 건 아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 모종의 관련이 있어서, 한 번쯤은 먹어보아야 했다.
디저트를 좋아하지만, 컵케잌은 내 취향의 디저트가 아니다. 항상 너무 달기만 하다는 느낌이었다. 디저트는 물론 달아야 한다. 하지만 덮어놓고 달기만 하다면 덮어놓고 매운 음식이나 덮어높고 짜기만 한 음식이 맛 없는 것처럼 맛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단 음식이라면 단 맛을 중심으로, 매운 음식이라면 매운 맛을 중심으로 되어 다른 맛들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아이스크림을 만들 때에도 소금을 넣어줘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요즘 가장 잘 나간다는, 그래서 이렇게만 말하면 어딘지 굳이 말 안 해도 되는 가게의 레드 벨벳 컵케잌을 사왔다. 어쨌든 하나 사서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우연찮게 가로수길에서 가게를 찾았다. 굳이 그 가게의 컵케잌을 먹어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왕 먹어보려면 가장 잘 나간다는 걸 먹어봐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잘 걸렸던 셈이었다. 어차피 현대 백화점 본점에도 매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어제가 휴일이었길래 다른 가게의 것이라도 사서 먹어봐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어디에선가 주워듣기로, 이 집의 생크림이라는 게 식물성이라고 해서 애초에 생크림을 얹은 쪽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솔직히 버터 크림 역시 내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여직원에게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레드 벨벳을 주더라. 계산하면서 생크림은 무엇이 원료냐고 물어보았더니, 잘 모른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런 데에서 직원에게 뭔가 물어봤는데 모르다는 얘기를 들으면 자기가 하는 일인데 대체 왜 모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어쨌든 식물성 아니면 동물성일거라고 했더니 식물성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장이 직접 운영하는 가게가 있고, 가맹점이 있는데 케잌 자체는 공장에서 나오고 크림은 매장에서 올린다고 했다. 자세히 보니 늘 지나치면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작게 느껴졌다.
옛날의 컵케잌 경험을 떠올려, 무지하게 달 것이라고 생각해서 커피를 진하게 내려놓고 먹어보았다. 일단 위의 버터크림을 숟가락을 살짝 떠서 맛보았다, 역시 달다. 케잌 자체만 먹어보려 크림을 헤치고 케잌을 뜨니 부슬부슬 부서졌다. 물론 하룻동안 냉장고에서 묵히기는 했지만, 쇼트닝이든 버터든, 만만치 않은 양의 지방을 넣어서 부드럽고 폭신폭신하게 만드는 것이 컵케잌의 케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 당황했다. 내가 좋아하는 컵케잌은 사실 가볍기 보다는 조금 무겁고 밀도가 높은 케잌에 크림을 가볍게 얹어서 그 둘을 거의 곤죽처럼 같이 먹었을 때에 식감의 균형이 맞는 것인데, 이 컵케잌은 크림이 무거웠고, 케잌은 정확하게 어떤 식감인지 느끼기 힘든 상황이었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컵케잌이 머핀과 같은 식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머핀과 컵케잌은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케잌은 맛 역시 좀 밋밋했다. 이 케잌의 빨간 색은 어떻게 얻어내나? 레시피들을 뒤져보니 코코아가루와 빨간 식용색소를 넣는다고 한다. 물론 색소의 힘이 압도적일 것이다. 어쨌거나 코코아는 넣지 않은 듯,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케잌은 그냥 백지와도 같았다.
그렇게 케잌이 백지와도 같다보니, 버터로 만들었다는 크림이 오히려 케잌 위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컵케잌이 아니라 컵크림과 같은 느낌이랄까? 냄새를 맡아보니, 케잌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고 크림에서는 버터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너무 진해서 이건 무슨 버터인지 궁금해지는, 조금 인공적인 버터냄새였다. 케잌의 맛을 느껴보려 반쯤 퍼먹었는데 별 맛을 느낄 수 없었고, 상온에 한 시간 정도 두었다가 나머지 반을 먹었는데 크림은 부드러워졌지만, 케잌은 그대로 부서지기만 했다. 역시 먹고 나니 개운치 않은 신맛이 감돌았는데, 어떤 이유에서든지 산화된 지방으로부터 비롯된 맛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컵케잌이라는 것이 애초에 내 취향이 아니었으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걸 떠나서 이 컵케잌이 음식 자체로도 그렇게 잘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케잌과 크림의 균형을 다시 맞추는 것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케잌은 조금 더 크고, 크림은 적당해서 그 둘이 맛이며 식감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 예쁘게 만들기 위해 크림을 많이 얹으면 눈으로는 맛있지만, 정작 입으로는 맛있는 디저트가 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가격에 대해서 언급하는 건 정말 의무처럼 느껴진다. 요즘 제과점에서 조각으로 파는 레이어 케잌 따위를 먹어보지 않아서 그 가격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런 케잌이 조각에 4,500원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컵케잌이 4,500원이라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건 먹어보기 전에도 죽 했던 생각이었다. 만드는 과정을 생각해보았을 때, 보통의 레이어케잌에 손이 더 많이 가니까. 물론 컵케잌을 장식하는 과정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누와즈를 만들어 갈라서 켜를 내고 시럽과 크림을 바르고 겉을 장식하고 자르는 이 모든 과정을 생각해 보면, 컵케잌의 장식 과정은 개별적이어서 한편으로 위험 부담이 적기도 하다. 물론 들어가는 재료를 비교해봐도 손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음식점에서는 장소를 제공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까지 고려해야 되겠지만 백화점에서는 앉아서 먹을 자리도 없고, 또 나처럼 사서 들고 가는 사람들도 많을텐데 그것까지 고려해서 4,500원이라는 가격을 붙인다면 개인적으로는 이 컵케잌에 매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더더욱 나는, 이 컵케잌이 유행하는 이유가 음식이기 때문이나 아니라 하나의 경향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맛을 생각하기 이전에 모양이나 색, 그리고 분위기가 있다. 그리고 그걸 손에 넣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컵케잌도 음식이다. 아직도 입에서 신맛이 가시지 않는다.
# by bluexmas | 2009/09/08 14:42 | Taste | 트랙백 | 덧글(21)
비공개 덧글입니다.
왠지 ‘그럴’ 것 같았는데 역시 ‘그랬’던 것이었네요:)
전 저 빨간 게 뭔가 새콤달콤한 맛이 날 거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컵케익은 집에서 좋은 재료로 만들어먹기도 하고
또 수수하지만 맛좋고 다양한 컵케익 파는 가게에서 사먹기도 하는데
저렇게 뭔가 장식이 화려한 것도 궁금하기도 하고 먹어보고 싶어서 도전해보려 했는데
이걸 보니 또 망설여지네요;
백지같은 베이스에 얹어놓은 휘핑크림이라니; 이 무슨…
맥코믹에서 나온 색소로 저 색을 낸다고 알고 있어요.
동물성 생크림일 경우 온도에 민감해서 식물성을 쓰고 있다고 하는데-_- 100프로 식물성이라는 것도 좀 그렇죠. 주 구성 성분이 팜유 뭐 그런 기름 성분에 가향을 한 그런 거니까요.
굿오브닝같은 경우 본점과 백화점 납품 케이크가 다르다는 야기도 들었답니다.
저도 언젠가 집에서 한 번 만들어보려구요. 진저브레드처럼 만들면 괜찮을 것 같은데… 수수한 컵케잌은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저도 한 번 먹어보고 싶어서요.
아무리 온도에 민감해도 100% 식물성이라면 좀 그렇네요. 정말 팜유에 불과한거잖아요.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온도 핑게는 궁색하잖아요.
온도도 온도고 동물성만 사용하면 빨리 데코가 무너져요^^;;; 각도 안잡히고…휘핑도 안되기도 하죠;; 여름같은경우엔 냉장고에서 꺼내서 30분만 버스타도 흐물흐물 합니다. 100% 식물성을 쓴다면 좀 양심 없는곳일 것 같네요;;(보통 제과점에서는 동물성과 식물성을 섞어 쓴다고하죠…)
백지같은 컵케익이라니..좀 궁금하긴 합니다. 아몬드가루도 안섞고 밀가루로만 했나;;;
물론 저도 집에서 생크림 올려 이것저것 만들어봐서 그걸 잘 알죠. 우유크림이 약하다는 걸… 그러나 비용이나 맛을 따져 보았을 때에는 신경을 좀 써야 하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컵케잌인데 케잌 자체가 ‘무맛’ 의 느낌이 가까웠다는 얘기였어요. 컵케잌에는 아몬드가루는 안 섞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비공개 덧글입니다.
전 오늘도 동네 커피집에서 커피 한잔에 외국 케이크 레시피책 구경만 하고 왔습니다;;
개인적으론 조각케잌류를 무척 좋아하는데, 맘에 들게 만든 게 없어서 책으로 눈요기만 하죠..
사실 그래서 제가 꾸역꾸역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죠. 모양은 허접해도 맛은 재료 잘 쓰면 먹어줄만은 하니까요.
푸슬푸슬하고 신맛나는 크림 발라진걸 4500원주고 사먹느니..
제대로된 레시피 얻어다가 코코아가루 듬뿍 색소 듬뿍 넣고 집에서 한꺼번에 여섯개 굽고싶네요 ^^; 위에는 저런 요상한 크림 말고 크림치즈 프로스팅 만들어서 발라서… 두개는 제가 먹고 네개는 가족들 주면 맛있을것같네요 ^^; ㅋㅋㅋ 너무 구체적인 계획을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