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 발 쌀국수 개그-가짜보다 더 가짜인 진짜

오산 역과 시장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가 쌀국수 집을 발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베트남 쌀국수를 먹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일단 우리나라 사람이 만들었다면 별로 진하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이 있어서이다. 또 알고 보면 길거리 음식에 가까운 대중음식인데, 뭔가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포장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편견까지(나는 어차피 편견 투성이 인간이니까)… 그러나 사진에서 볼 수 있듯, 베트남 사람이 직접 하는 듯한 느낌의 조악함이 간판에서 풍기는게 마음에 들어서 한 번 시도해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개그의 시작이었다.

어제 점심, 식당에 들렀다. 간판은 조악했지만 내부는 기대보다 훨씬 더 깔끔했고, 대형 평면 텔레비젼에서 케이블 영화마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처럼 일하는 사람들은 베트남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잘 하면 이 시골 구석에서 대박 터지겠다! 라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는데, 카운터에 앉아 있는 젋은 남자는 핸드폰으로 계속 통화하면서 물도, 메뉴판도 대강 놓고 사라졌다. 그것도 쓰레빠를 찍찍 끌면서… 게다가 식탁 위에는 쌀국수 집이라면 기본으로 갖추고 있는 스리라차 같은 소스 병도 없었다.

그리고 메뉴, 뭐 쇠고기 쌀국수만 해도 들어가는 고기 부위에 따라 최소 열 두서너가지는 될텐데, 베트남 사람이 하면서도 달랑 소고기 쌀국수, 닭고기 쌀국수와 같이 한 종류씩, 그리고 반 미 샌드위치나 밥 종류도 별로 없었다. 으음, 예감이 불길했으나 어쨌든 먹어는 봐야할 것 같아서 쌀국수 하나와 도저히 시킬게 없어서 튀긴 스프링롤을 주문했다. 그러면서 실란트로(고수)를 많이 달라고 그랬는데 못 알아듣는지 없단다. 베트남 식당에 고수가 없어? 점점 더 불길해지는 예감.

식당에 손님이라고는 나와 일행, 딱 둘이었는데 20분도 더 지나서 음식이 나왔다. 먼저 쌀국수… 나는 경악했다. 뭐 굵은 국수야 혹 지역의 차이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고기 서너점에 야채도 거의 없는, 정말 뭔지도 알 수 없는 이 따위가 쌀국수라니? 그것도 베트남 사람이 만드는데? 거기에다가 야채랍시고 담아온 접시엔 정말 기절할 뻔 했던 것이, 숙주나물이야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고 쳐도 세상에 쑥갓이… 실란트로나 바질의 대체품이 쑥갓인지, 아니면 베트남의 어느 지방에서는 쑥갓을 쌀국수에 집어 넣는지 나야 모르지만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 어쨌든 쑥갓과 숙주를 국물에 넣었으나 국물은 벌써 온기를 꽤 잃었고 어느 야채도 숨이 죽지 않았다. 게다가 벌써 국수는 불어서 젓가락으로 집기 조금 어려운 상태가 되었고.

그리고 조금 더 있다가 나온 스프링롤, 어디에서나 먹을 수 있는 스프링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히려 속은 간이 살짝 덜 되어 싱거웠다. 채 열 개도 되지 않는 것 같은데 가격은 6천원. 저렇게 말도 안되는 쌀국수 역시 6천원이었다. 아니, 베트남 사람이 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양도 너무 적어 배도 채 부르지 않은 두 음식을 두 사람이 나눠 먹고, 무슨 영문인지 주는 커피믹스로 만든 커피를 마시고 돈을 내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카드는 또 받지 않는단다. 그래서 피같은 현금을 내고 퇴장.

그렇게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엄청나게 황당하다. 같이 간 일행과 충격을 덜어내기 위해 열심히 대화를 나눴는데, 내린 결론은 그 근처에 사는 베트남 사람들을 위한 장사를 하려 연 식당일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우리 같은 외국인(?)이 갔을 경우엔 그런 메뉴를 내놓고 대강 음식을 만들어 파는게 아닐까… 하는 것.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실란트로도 바질도 없는, 또 고기도 없는 쌀국수를 내놓고 6천원이나 받는다는 건 정말… 게다가 맛도 정말 너무 없고… 이렇게 기본이 안 된 음식점을 정말 베트남 사람들은 동포가 하는 곳이라고 즐겨 찾을까, 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국수 맛이 괜찮으면 베트남 커피도 마셔볼까 했는데, 국수를 본 순간 그런 욕구는 싹 가셨고, 게다가 4천원 이라는 가격도 그다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여기는 오산이지 서울이 아니니까. 괜찮았으면 단골 삼으려고 했는데 무척이나 슬펐다. 고국에서도 외국인에게 피 빨리는 듯한, 편견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난 심지어 노르웨이에서 조차도 한식은 안 먹을지언정 쌀국수는 찾아서 먹던 사람인데, 고국에서 먹은 쌀국수가 이랬다는 데에는 정말 황당함을 금할 수 없…

 by bluexmas | 2009/05/26 15:55 | Taste | 트랙백 | 덧글(29)

 Commented by 카이º at 2009/05/26 16:38 

…혹시 우리가 모르는 진정한 베트남의 쌀국수가 아닐까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5/26 21:08

그,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텔레비젼에서 본 베트남의 쌀국수는 저렇지 않았어요 ㅠㅠ

 Commented at 2009/05/26 16:4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5/26 21:08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그러나 웃는 얼굴로…^^

 Commented by 늄늄시아 at 2009/05/26 17:24 

저거 혹시 인스턴트 아닐까요? 베트남산인스턴트 쌀국수를.. OTL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5/26 21:09

아아 그럴지도 몰라요. 정말 울고 싶었어요. 특히 가격이 정말…

 Commented by 라세엄마 at 2009/05/26 20:26 

저 사는 곳에 아편넣어 판다는 소문이 돌다 문닫은적도 있는[..] 고명하신 쌀국수집도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이런식으로만 메뉴가 있는데..

…쌀국수는 원래 닭고기만 열두가지는 되는 거였던건가..;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5/26 21:10

아, 아편이라니 가서 먹어보고 싶;;;

닭은 잘 모르겠구요. 소고기 쌀국수일 경우엔 넣는 고기 부위에 따라 다른 쌀국수가 되더라구요. 양지 같은 정육 부위나 천엽 같은 내장 이런 걸 넣고 빼고 해서요.

 Commented by 라세엄마 at 2009/05/26 21:36

여기선 그냥 한솥 끓이는 국물에 면 넣었다 꺼내서 그릇에 담고 국물 붓고 닭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주문대로 올리고 그냥 주는데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5/26 21:37

그렇겠죠… 천엽이나 이런 부위는 사람들이 싫어할지도 몰라서 안 쓸지도. 그런 부위가 참 맛있더라구요 저는. 부드러운 쌀국수와 오톨도톨한 천엽의 식감 대조도 좋구요.

 Commented by gaya at 2009/05/26 21:35 

베트남에서 먹었을때 나오는 꾸미 중에 쑥갓같은 거도 있긴 했던 거 같음(바질이었나..암튼–)..레몬 대신에 라임이었고…

주로 이름 모를 풀잎 파리들이 한 3종 정도..향이 좀 묘한 게 한국서는 못 본 풀잎들..

고수는 저도 왕 좋아하는데도 이것들 씹는맛은 그닥..그래도 다 넣어 휘휘 저어 먹었네요.

근데 의외로 고수는 꾸미 목록에 없었습니다. 샤브샤브 포함 쌀국수만 3번 먹었는데 다 없었어요..아마 요청하면 알긴 할텐데 이게 발음이 안 되어..–

가게 따라 좀 다르지만 최소 3종 이상의 꾸미는 갖다주던데…저 메뉴는 너무 성의 없는 심플..베트남에서라면 가장 뜨내기 가게일듯..돈 아까우셨겠슴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5/26 21:36

제가 미국에서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 가던 단골 가게에서는 라임과 숙주, 그리고 할라피뇨로 추정되는 고추 저민 것 두세 쪽에 바질, 그리고 실란트로(고수)나 그보다 조금 더 향이 강한 쿨란트로-민들레 잎과 억지로 닮았-를 내왔습니다. 보통 베트남 가게라면 고수를 기본으로 가지고 나오는데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가게는 요청해야 내주더군요. 한 때 입에 맞는 걸 찾을 때까지 많은 쌀국수 집을 가 봤는데, 저 집은 그냥 성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서울도 아니고 시골에서 육천원에 고기 몇 점 들은 음식이라니 좀 안타깝죠.

 Commented by 백면서생 at 2009/05/26 21:58 

저는 한국에서는 아직 한번도 못 가보았는데, 소개 부탁합니다. 종로나 광화문 일대에 괜찮은 곳이 있을까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5/26 22:16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저도 우리나라에서 쌀국수는 처음이에요. 먹어보고 말을 해야되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담백하다고 하더라구요. 쌀국수는 진해야 되는데… 게다가 가격도 어떤지 모르겠구요(전 누군가 만나지 않는 이상 경제적인 이유에서라도 집에서 밥을 먹는 사람입니다).

 Commented by 불별 at 2009/05/27 00:02

안산근처에 사신다면 원곡동에 있는 베트남 아주머니가 운영하시는 식당을 추천드립니다. 그 외에 한국에 있는 베트남쌀국수 체인점들의 맛은.. 대충 다 비슷한듯 해요. 그 중 가장 베트남 맛과 비슷한데는.. 사당역 근처 파스텔 시티라는 빌딩에 있는 베트남 쌀국수집이 기억나네요. 상호는 기억이 안나고요; 근데 여기도 맛이 비슷하기보다는.. 향이 비슷했어요.

 Commented by 백면서생 at 2009/05/27 02:19

그렇군요. 사실 저는 베트남 쌈을 좋아했는데, 그건 더 어렵겠군요. 베트남에는 안 가보았지만, 대만에 시집온 월남분이 하는 완전 시골 베트남식당에서는 몇번 먹어보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김치 담그고 남은 멸치액젖을 주었더니 무지 좋아하더라는… 하긴 그분들 소스와 비슷하더군요.

안산은… 사당도 잘 모르긴 마찬가지군요. 노란색의 간판을 쓴 체인점은 많이 보기는 했습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5/27 21:32

안산보다 사당역이 찾아가기 쉬우니 일단 거기라도 한 번 가봐야 하겠네요^^

 Commented by highseek at 2009/05/26 22:03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베트남 ‘서민’의 쌀국수.

(…그냥 이렇게 생각하시는 편이..-_-;; 근데 그러기엔 가격이 ㅎㄷㄷ)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5/26 22:16

아아.. 제가 본 텔레비젼의 베트남 서민들은 정말 저것보다 몇 갑절 더 푸짐해보이는 쌀국수를 먹던걸요-_-;;;

 Commented by highseek at 2009/05/26 22:18

…에이. 텔레비전에선 원래 과장되기 마련이라능..(..)

 Commented by asteray at 2009/05/26 23:50 

이거 좀 대단한데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5/27 21:28

그렇죠? 이거 좀 대단했습니다 ㅠ ㅠ 특히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Commented by 불별 at 2009/05/26 23:54 

혹시 경기도 안산 원곡동의 베트남사람들이 늘 붐비는 쌀국수집은 가보셨나요? 한국 쌀국수 집 중에선 거기가 현지 맛이랑 가장 비슷한 듯 하더군요.

근데 사진만으로 봐서는 저거야말로 진정한 베트남 ‘서민’의 쌀국수인데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먹는 쌀국수는 저것보다도 양이 적어요 흑흑..

전 베트남에서 처음 쌀국수를 먹고는 맛들여서 한국에서도 종종 먹는데, 한국에서 먹을때마다 그 후덜덜한 양에 놀랍니다. 베트남에선 조금 과장해서 밥 한공기보다도 면을 조금 주는데..

그리고 현지에선 쌀국수가 십수가지로 나뉘어져 있지는 않던 기억입니다; 오히려 파스타처럼 면의 종류에 따라 나뉘었어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먹는 퍼(여기에 닭고기면 Pho Ga, 소고기면 Pho Bo..), 약간 당면 비슷한 맛인 후 띠우,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는건지 애매한 분 보 후에 등… 사실 제가 먹을때는 다 비슷하게 느껴졌는데 거기 사는 친척들은 각각 좋아하는 쌀국수가 있더라고요. 어떤 가게는 후띠우를 잘하고, 어떤 가게는 퍼를 잘하고.. 그런 차이도 있고요.

마지막으로; 베트남에서 쌀국수먹을때 바질은 한번도 못본 듯 합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5/27 21:31

덧글 올려주신 것 보고 이래저래 찾아봤는데, 그 동네에 베트남 사람들이 많이 사는 줄은 몰랐어요. 제가 워낙 사정에 어두워서… 저는 미국이랑 뜬금없게도 노르웨이에서 쌀국수를 먹었는데, 미국은 고기가 싸서 그런지 엄청나게 많이 주고 국수는 별로 안 주고, 뭐 그랬습니다. 제가 먹은 미국에서의 쌀국수들이 얼마나 미국화 되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 동네에서는 쇠고기 쌀국수라면 들어가는 고기의 부위에 따라서 종류를 가르더라구요. 그게 미국화일지도 모르죠.

어쨌거나 긴 덧글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간 날 때 한 번 가보려구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5/27 21:32

이상하게 미국에서는 언제나 바질을 먹었거든요. 바질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레몬 바질이었던가…

 Commented by 불별 at 2009/05/26 23:55 

아, 다시 보니 저 메뉴판에도 퍼 말고도 분 보 후에는 있는것 같네요. 돼지고기 쌀국수라고 써있는거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5/27 21:31

그렇군요^^

 Commented by 바나나양 at 2009/05/28 14:51 

저도 베트남가서 쌀국수를 먹었는데 정말 서민적인 음식이던데.

길거리서도 먹어보고 유명레스토랑서도 먹어보고 현지인들이 바글거리는 식당에서도 먹어보고….

드신 것과 별 다르지 않는 거 같은데..

그리고 베트남 쌀국수 우리나라에서 파는 것과 맛 비슷해요. 향이나 이런 부분에서 향신료가 안먹어 본 것들이어서 그렇지..

엄청 진한 국물도 아니구요.

암튼 쌀국수는 진리! 사랑해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5/29 00:14

앗, 그럼 제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요? 그러나 육천원은 이 시골구석에서 정말 너무한거죠 T_T 어쨌든 쌀국수는 진리! 입니다.

1 Response

  1. 06/25/2015

    […] 말리지 않는다. 바질/실란트로/숙주/양파/파 등도 마찬가지(참고로 쑥갓은 오마주). 원하는 걸 원하는 만큼 얹고 육수만 끓는 걸 부어주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