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한 건 질색
대를 반 정도 넘긴 어느 시점에서 나는 양갈래 길에 서 있었다. 그러니까 딱 양갈래 길, 이쪽 아니면 저쪽 밖에 선택할 수 없는 상황, 어떤 사람이 될래? 마치 원하면 그대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처럼. 나는 별 다른 망설임 없이 지금의 이 길을 택했다. 그러자 나는 지금의 이런 사람이 되었고, 그 반대쪽 길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기억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게 뭐였지? 가끔 이런 사람으로 사는게 싫증날 때면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러나 떠오르는 것은 없다.
이렇게 사는 지금의 나는 무엇보다 어색한 걸 싫어한다. 옷차림도 머리 모양 같은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인간관계에서 어색한 건 질색이다. 사람들, 특히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 가기 싫어하는 이유는 그 자리에 가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돌아오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한다. 약 30% 정도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 따위 때문이고, 나머지는 순수하게 침묵이, 그리고 그 침묵이 빚어내는 어색함이 싫기 때문이다. 무슨 화제로도 누구와도 계속해서 얘기할 수 있다. 그러다가 나는 곧 지쳐버리고, 모임의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기 1킬로미터 쯤 전에서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와 집으로 향한다. 계속해서 말을 해대는 내가 싫기 때문에 이런 자리에 가지 말아야 되겠다고 늘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요즘엔 정말 거의 가지 않는다.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는 건 정말 싫은 일이다. 자주 만나거나, 아니면 아예 안 만나는게 더 좋다. 그렇게 사람을 만나서 처음 삼십 분이나 한 시간 정도의 어색함과 안부 확인 따위의 대사 읊어대기는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일들 가운데 하나다.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아이들은? 마누라는? 그래도 어색함이 가시지 않으면 기억을 더듬어 온갖 것들을 끄집어 낸다. 그 뭐니, 여동생 딸아이, 그러니까 네 조카, 돐 언저리에 많이 아팠다면서 지금은 괜찮아? 아, 지금 벌써 네 살이나 되었다고? 그것도 만으로? 세월 참 빠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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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때면 친척집을 전전했었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있는 예산에서 한 달도 넘게 머무를 때도 있었고, 서울의 고모들 집에서 한 주일 정도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을 오래 보내고 집에 돌아오는게 참 싫었다. 부모님마저 어색했으니까. 부모님을 어색하게 느끼는 건 참 받아들이기 힘든 감정이었다. 예를 들면 다섯 살 때 처럼, 그 여름 친가에서 한 달인가 두 달을 보내고 할아버지 손을 붙들고 집에 돌아왔을 때, 처음으로 가스렌지불로 지은 밥이며 끓인 국을 먹었다. 그러나 여전히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색한 사람들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선택하기 훨씬 전에도 나는 이렇게 생겨 먹은 사람이었구나. 그러나 그때는 이것 말고도 다른 무엇인가도 내 안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얘기한 것처럼 그게 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어쨌든 하던 얘기를 마저 하면, 같은 맥락으로 소집일이나 긴 방학후의 개학날 등등 역시 별로 기분 좋은 날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그렇게 오랜만에 만나서 죽도록 반가운 친구가 별로 없었던데다가, 학교는 집과 멀어서 학교친구=동네친구, 가 절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살았던 동네에 친구가 많았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방학때에도 집에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책만 읽었으니까. 눈이 내리지 않으면 밖에 나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가끔, 고등학교, 대학교 후배를 만난다. 구려터진 지방학교에서 잘 써주지도 않은 학교를 다녀서 같은 고등,대학교를 나온 후배는 귀하다. 잘 해주고 싶은 마음이 물론 있다. 결혼해서 온 모양인데 언젠가 놀러오겠다는 얘기를 한지가 벌써 3년은 된 것 같지만, 두 번이나 전화번호를 받아갔음에도 우리는 만나서 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 내가 꼭 그걸 바란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냥 밥을 먹자고 얘기했는데 안 먹게 되는 이유는 뭘까, 그러면 왜 그런 얘기를 할까, 궁금해 할 뿐이다. 며칠 전인가 아주 오랫만에 학교 체육관에서 봤는데 못 본척 지나쳐갔다. 물론 당연히 봤다. 오랫만이네, 와이프는 애잘 낳았니? 아 뭐 이런 어색한 얘기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형, 언제 밥 한 번 같이 먹어요. 그러니까 언제? 어색한 건 질색이다. 가끔은 저 많은 사람들과 다 아는 척 하는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니까.
언제가 설날인지, 아니면 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집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일부러 안 받은 건 아닌데 안 받게 되었다. 이런 명절이 되면 자주 얘기를 하는 사람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같이 모이게 된다. 그리고 나는 연례행사처럼 이뤄지는 어색한 대화가 싫다. 그건 사람이 싫은 상황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그건 이차적인 문제고, 나는 일단 그런 사람들과 벌어지는 어색한 대화가 싫고, 또 그런 사람들과 벌어지는 대화가 어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더 싫다. 기회는 많은데 그걸 다 흘려보내고 나서는 그들과 내가 가질 수 있는 대화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그저 어색한 그런 것들. 책을 읽듯 매년 반복되는 같은 인삿말이 그렇게 오랫동안 발화될 시간을 기다려왔음에도 아무런 표정도 없이 흘러나온다. 아, 나는 대체 어떤 감정을 가져야만 하는 것일까.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단 서너 음절의 말로도 누구와 어떻게든 감정을 주고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전화선 이쪽에서도, 또 저쪽에서도 그저 어색함이 오래 전부터 산소를 대신해 공기의 제 1 성분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런 상황,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었어?어색한 건 질색이라니까. 어제도 나 혼자 머무르는 이 공간에는, 몇 번의 전화벨 소리와 봄을 기다리는 마른 가지를 흔드는 바람만이 소리의 전부였을 뿐이었다. 나는 한 천 년쯤 전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소파에 멍하니 앉아, 저녁 햇살에 길게 드리워진 나의 그림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 by bluexmas | 2009/01/27 10:33 | Life | 트랙백 | 덧글(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