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받은 그림엽서
지금은, 정말 그랬던가? 라고 생각될 정도로 기억이 희미하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그때 내가 엽서를 보내겠다는 얘기를 블로그에 꺼냈던 이유가 바로 이 엽서들이었던 것 같다. 사실은 내 얘기조차도 그렇게 깊이 이곳에 늘어 놓고 싶지 않으니 내 가족들 얘기는 정말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네덜란드 어딘가에 있는 무슨 대학원으로 국비 유학-이라고 알고 있는, 아니면 우리 집에 그런 돈이 있었을리 없으니…-을 떠나게 된 것이 77년 경, 내가 우리 나이로 세 살, 그리고 동생은 엄마의 뱃 속에 있었다. 기억하기로 돌아오지 않을까봐 볼모처럼 자식들을 데리고 갈 수 없도록 정해놓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여기에 남아 있었겠지. 그리고는 시간이 좀 지나서 어머니는 역시나 남자아이였던 내 동생을 낳고 그렇게 남자 아이들 셋과 별 도움 안 주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시집살이까지 해가면서 살았는데, 내 동생은 생후 8개월쯤인가에 감기에 걸렸고, 그게 폐렴으로 악화되어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라고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재작년인가 3년 전인가, 내가 죽느니만도 못하게 살아가고 있을 때, 어머니는 그 아이가 사인이 폐렴이라기 보다는 주사를 잘못 맞은 탓으로 발생된 약물 쇼크 때문이라고 얘기하셨다. 의사가 처방을 잘못 내렸는지, 아니면 처방은 맞게 내리고도 다른 주사약을 썼는지, 지금은 또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래서 어머니는 당신의 잘못으로 아이가 떠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흘려보내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고 얘기하셨다. 그 의사를 용서하는 것도, 또 그렇게 아이가 떠났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힘들셨다고… 그런 세월이 계속되면서 어머니 자신의 삶이 위태로워질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낄 지경에 다다르시고 나서야 어머니는 이런 일들이 나 자신의 삶을 더 이상 흔들어놓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그때 그렇게 살고 있었던 나에게 들으라고 얘기하셨다. 돌아보면 그것이 결국엔 전환점이 아니었던가 싶다.
어쨌든, 동생이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가 힘겨워하자, 아버지는 당신이 혼자 사시는 것도 버겁고 해서 결국 나와 이름 두 자를 같이 쓰는 분을 시골 할아버지 댁에 맡기게 하고 어머니를 네덜란드로 부르게 된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어이없었던 것은, 어머니는 결국 그 곳에 가서 그냥 집에서 살림만 했던게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과자공장에 취직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시고 어머니는 그 낯 시간 동안 과자공장에서 박스 포장에서부터 시작해서 온갖 일들을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1년 인가 지나서였나? 아버지의 공부가 끝나서 두 분이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다음, 어머니는 모 방송국에서 주최한 가정주부들 수기 경연대회 같은데에다가 그 네덜란드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글을 보내 상을 받으셨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올해 글 쓰신 걸로 대박을 터뜨리시기는 했지만, 그 시작은 근 30년 전에 어머니가 했던 것이다. 그때의 일은 아직도 기억난다. 그 시상식에 입고 가라고, 양장점을 하시던 외할머니가 나비 넥타이를 매는 어린이 정장을 지어주셨으니까. 어딘가에 사진도 있을테고.
하여간, 아버지 혼자, 아니면 그 이후 어머니와 함께라도 두 분은 그림 엽서를 보내시곤 했다. 이게 대체 얼마나 자주 왔던 것이었는지, 지금으로써는 알 길이 없다. 그 때 나는 겨우 두어살 정도였기 때문에 당시의 기억은 전혀 없으니까… 가끔 이 엽서를 아버지께서 어머니와 주고 받은 편지 등등과 함께 보관하시는 서랍인가 어딘가에서 꺼내서 보다가, 작년 이맘때 한국에 갔을 때 나에게 쓰셨던 것들을 다 골라서 들고 왔다. 이제는 내가 보관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어디엔가 두었는지 기억도 못하다가 여름 휴가를 떠나기 얼마 전인가 우연히 찾게 되어서, 그림 엽서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엽서의 내용이라는 건 대부분 멀리 떠나 있는 부모가 어린 자식들에게 쓰는, 뭐 그런 내용들이겠지만, 그 가운데 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건 바로 이 엽서,’##야, $$하고 잘 놀지? $$이가 ‘형’ 이라고 부르는가? 아직 어리니까 못하지. $$이가 너만큼 크고 네가 형만큼 크면 너보고 ‘형’ 이라고 그럴꺼야. 엄마 말씀 잘 듣고-‘
그러나 나는 그 아이가 나를 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내 삶에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 가운데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것.
1.5년 전 여름, 여름학기를 유럽에서 들었을 때 네덜란드에서 일부러 하루를 내서는 두 분이 살았던 도시에 들렀었다. 네덜란드는 작은 나라라서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로 30분만 가면 닿을 수 있는 도시였는데, 아버지가 다니셨었던 학교는 찾을 수 있었지만 어머니가 피땀 흘렸었던 과자공장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동네 사람들 여럿을 붙잡고 물어봤는데 어느 누구도 과자 공장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시간이 너무 오래 흐른 것일 수도.
2. 휴가때, 스톡홀름의 Nordic Museum에서 위의 엽서들과 분위기가 너무 비슷한 엽서가 있어서, 그걸 써서 한국으로 보냈다. 말하자면 내가 서른 몇 해 만에 보내는 답장이었던 셈.
# by bluexmas | 2008/12/08 10:09 | Life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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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 3님: 죽을 것 아니까 열심히 살아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해요.
비공개 4님: 그냥 일이 많아서 잠시 닫아 두었죠 뭐… 허리 불편하신 건 좀 많이 나아지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