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추석상

…이라고 해봐야 사실은 토란국 끓이고 집을 비운 동안 냉장고를 지키고 있었던 파김치-너무 오래 묵어 파김치가 정말 파김치 꼬라지를 하고 냉장고에 누워있었다. 그래도 곰탕 푹 끓여서 같이 먹으면 먹을만 할 것 같은데… 집에서 끓이는 곰탕은 영 맛이…-를 대신할 깍두기를 담근 정도. 사실은 추석이 언제인지 올해는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타향살이도 그렇지만 올해는 아예 그 타향살이마저 외면한채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으니까.

그러던 와중에 아, 추석이 지나가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 건 연례행사처럼 추석이면 날아오는 아버지의 메일, ‘얘 올해도 토란국 끓여놓고 네 생각했다-.’ 뭐 연초에 떡국 끓여놓고 네 생각했다, 이런 얘기는 안 하시는데 추석이면 어김없다. 올해는 눈치없게 나랑 이름 두 자를 같이 쓰시는 분께서 발화를 한 모양이고 덕분에 두 양반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아들을 괜히 걱정하신 듯. 내가 밥 해 먹는 문제로 두 양반들 신경쓰시지 않게 하려고 때로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듯 스스로를 훈련시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만들었고, 토란국이라면 이젠 발로도 끓일 수 있는 국이 되었는데도 매년 추석때면 어김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뭐 부모님들 마음이 다 그렇다고 말이나마 할 수 있겠지만 부모 안 되어본 내가 그 마음 어찌 알겠나… 그저 최선을 다 해 국 끓여먹고 집에 전화 한 통 걸어서 제발 이제 그런 걱정일랑은 하지 마시라고 열심히 두 양반들 나무라는 수 밖에.

사실 생각난 김에 송편도 먹고 싶었는데, 이번 주엔 만들기 좀 버거워서 그냥 사먹을 생각으로 한국 수퍼마켓에 일부러 찾아갔음에 별로 먹고 싶지 않게 생긴 변종 떡들-옛날에 할머니께서 만드시던 떡과는 좀 거리가 먼, 색은 가지각색으로 화려하지만 맛은 다 똑같이 너무 달기만 한-이 널려 있는 가운데 송편은 없었다. 그냥 다음주 쯤 한 열 개라도 만들어 먹어야 할 듯(찾아보면 작년에 만들어 먹은 송편 사진이 블로그 어디엔가 있다. 누군가 그거 보고 ‘음식 오타쿠’라고 했던 기억이 새삼스레…). 이 근방 한국 수퍼마켓에 나가는 떡들이 다 한 떡집에서 나오고 그 본거지가 예전에 가던 수퍼마켓에 있는데 언제나 장사하기 싫다는 얼굴로 앉아있는 주인 남자 떡 팔아주기 싫어서 거의 사 먹어 본 적이 없다.

비록 토란국이라는 음식으로 추석을 기억하고는 있지만, 아마 나는 한국 사람들 가운데 명절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 축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건 내가 타향살이를 오래한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우리나라에 있을때에도 명절을 싫어했으니까. 다른 백만가지 이유를 다 제껴놓더라도 나는 철이 들고 나서 어머니에게 지워지는 그 비이성적인 가사노동의 부담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노동에는 명분이라는게 없었다. 그래서 사실 나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감히 싫어했었다.

어쨌든, 글 다 썼으니 집에 전화하려 1층에 내려간다. 

 by bluexmas | 2008/09/21 12:59 | Taste | 트랙백 | 덧글(5)

 Commented by starla at 2008/09/21 13:42 

전 추석에 토란국이나 토란탕을 먹는다는 걸 얼마 전에 알았지 뭡니까.

bluexmas님과 달리 발로 국 끓일 줄 몰라서 ㅠ_ㅠ 감히 시도는 안 해보고 있지만, 그러고보면 이 좁아터진 땅덩이에서도 사람들 기억은 얼마나 다른 것이 되는지…

대신 울엄마님께서는 소가 들어가지 않고 그냥 떡반죽 군데군데 검은콩이 박힌 송편을 좋아하셔서 아주 가끔 만드시는데(대부분 사드시고요;;;), 그건 또 그것대로 기억할 만해요.

다시 일상 복귀하시는군요. 건강하셔요.

 Commented by Eiren at 2008/09/21 13:42 

Bluexmas 님 댁에서는 추석 때 토란국을 끓여드셨군요^^ 제게 추석은 갈비찜과 생선전으로 기억에 남아있어서 뭔가 색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네요.

토요일 밤이나 일요일에 식사 포스팅을 올리시니까 뭔가 bluexmas님께서 정말 여행에서 돌아오셨구나-하고 실감이 납니다. 남은 일요일도 편안한 하루 되세요^^

 Commented by zizi at 2008/09/21 19:10 

어쩜 요릴 그리 쉽게 잘하시는지.. 토란국과 깍두기, 멋져요 멋져.

저도 같은 이유로 명절과 돌아가신 친할머니를 싫어해요. 도저히 용서가 안됩니다.

 Commented by basic at 2008/09/22 02:41 

토란국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데 무슨 맛일지 많이 궁금해요.;; 토란 자체만 먹어 봤어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09/22 13:43 

starla님: 잘 지내셨어요? 블로그도 계속 닫혀있고 제 블로그에 들르시는지도 잘 모르고…해서 소식이 궁금했답니다^^ 저 역시 발로 국은 못 끓이죠. 시도는 해 봤지만…-_-;;; 어머님께서 만드시는 식의 송편도 맛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걸 시도해봐야 될 것 같네요. 종종 소식좀 들려주세요.

Eiren님: 생선전도 갈비찜도 있는데 어째 토란국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참…그렇다고 생선전이랑 갈비찜 안 먹는건 아니죠. 언제나 토할때까지 먹었죠, 명절에는. Eiren 님도 주말 잘 보내셨기를…^^

zizi님: 잘 하긴요. 먹어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다 사진발일지도 몰라요… 토란국은 그렇게 끓이기 어렵지 않은걸요 뭐. 토란을 소금물에 삶았다가 국에 넣는것만 빼고는.

저희 집에선 할머니는 며칠밤을 새가면서 음식 준비를 하셨다고… 참 살기 어렵죠.

basic님: 그 토란을 쇠고기 국물에 넣은 맛이에요. 감자국이랑도 어떻게 보면 비슷하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