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연론자의 변명

블로그에 들러 주시는 손님들의 무한 염려에 힙입어 무사귀환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모든 일들이 막상 닥치고 나면 너무나 별 것 아니라서, 그걸 가지고 닥치기 전까지 불안을 느꼈던 제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은데,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수천년동안 다져온 치과환자로서의 내공에 이제는 모든 치과적 고통이 시덥지 않게 느껴지더군요. 보통 사람들은 잇몸에 마취주사 맞는게 제일 고통스럽다고들 하는데, 저는 너무 많이 맞아봐서 별 느낌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국소마취제를 주사 놓을 부위에 바르고 주사를 놓더군요. 그렇다면야 더더욱 아픔에 떨 이유가 없는 것이겠죠.

병원에 도착하니 필요한 처방전과 발치 후 주의사항이 빽빽하게 적힌 종이, 심지어 얼음팩까지 준비해서 간단한 교육(?)을 실시하고 마취주사를 서너대 열심히 맞은 후 이를 뽑았습니다. 저는 그냥 보철이 씌워진 상태로 잡아 뽑을 줄 알았는데, 그러면 뼈가 상한다고 씌운 금을 벗겨 내고 이미 다 죽은 이 뿌리를 하나씩 뽑더군요. 역시 x-ray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가 부러졌다고 fractured 하더군요. 근 제가 아는 모든 치과의사 선생님들한테 사진을 보내 여쭤봤는데, 아직도 이 블로그에 들러주신다고 믿고 있는 P선생님께서 가장 정확한 진단을 내려주셨던 바, 다음에 뵙게 되면 꼭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해드려야겠네요(잘 지내시죠?^^).

하여간 그렇게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만 죽어라 하던 제 14번 왼쪽 어금니는 그렇게 어제부로 저와 작별을 고하고 차가운 치술기구용 쟁반위에 일곱조각으로 누운채 사라졌습니다. 보고 싶지 않으니까 치워달라고 했는데, 의사선생님께서 친절하게도 보여주시더군요. 뿌리 속에 들었던 신경치료용 막대기들(이걸 뭐라고 부를까요?)까지 함께. 그리고는 근처 약국에 들러 항생제만 조제해가지고는 집에 돌아와서 미리 준비해둔 쇠고기국물로 죽을 끓여 역시 미리 담궈둔 물김치와 점심을 먹고는 소파에 누워 텔레비젼을 틀어 놓은 채로 긴긴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진통제는 애초에 먹을 생각이 없어서 조제 안 했는데, 역시 별 통증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약간 불편하고, 계속해서 영구치를 잃었다는 쓸데없는 상실감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너무 멀쩡하구요. 그래도 운동은 하지 말라고 그래서 이번 주일에는 운동도 쉬고, 약간 아픈척 쉴 생각입니다. 아, 그나마 웃을때 잘 안 보이는 이라서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던지… 그나저나 그전에 씌워놨던 금을 받아가지고 왔는데, 이걸로 뭘 하면 좋을까요? 병원에서는 반지 만드는 사람도 봤다던데, 그럴 만큼 많지는 않은 것 같고, 끝이 둥근 공 모양으로 된 귀걸이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 중이라지요.

하여간 걱정해주신 분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무사히 돌아왔어요, 훌쩍 T_T 타향에서 홀홀단신으로 치과에 이뽑으러 가는 처량한 신세라니… 아무래도 전 전생에 주변 사람들을 너무 힘들게 해서 이번 생에는 아무도 없이 혼자 살 팔자인가봐요. 

 by bluexmas | 2007/07/12 11:12 | Life | 트랙백 | 덧글(11)

 Commented by 카렌 at 2007/07/12 11:21 

으윽 수고하셨어요. 한국에서도 국소마취제 좀 놓으면 좋을텐데.. 목걸이 만드세요!

 Commented by Eiren at 2007/07/12 11:43 

고생하셨습니다..신경치료 후 박는 쇠막대기[;;]는 임플란트일까요? 블로그에도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니 혼자 살 운명은 아니실겁니다~희망을 가지세요^^

 Commented by 보리 at 2007/07/12 11:48 

어우, 수고했어요~ 토닥토닥~ 이틀정도는 쇼파위에서 쉴 자격증을 드리지요.

… 다음주엔 제차례입니다. -_- 일단 크라운을 벗겨서 상태를 봐야하는데, 대체 어떨지 심히 궁굼해서, 때때로 심장이 쫄깃쫄깃해지고 있어요. 기분이 마치 예방주사맞으러 줄서있는 초등학생 같군요. 그 앞줄이 점점 줄어드는…

 Commented by 笑兒 at 2007/07/12 11:50 

으윽; 정말 치과는 무서워요 ㅠㅠ

진짜, 무리하지 마세요-;;

 Commented by 이비 at 2007/07/12 14:27 

살아 돌아오셨군요!

p.s.

따라불러 보아요.

http://www.youtube.com/watch?v=poUoCggQZd0

 Commented at 2007/07/12 19:4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7/07/13 06:0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asic at 2007/07/13 11:55 

몸조심 하세요- 이빨에 좋은 음식이 뭔지 몰라서 추천은 못해드리지만;; 어서 다 나으시기를. 어디든 아프면. 병원에는 혼자 가기 무섭고 외로우니까 앞으로는 아프지 말아야겠죠?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7/13 13:08 

카렌님: 저는 귀걸이가 더 좋아요! 볼 귀걸이 만들어서 하고 다니죠 뭐.

Eiren님: 임플랜트는 앞으로 해야 되는 것이구요. 그 전에 했던 것은 Root Canal이라고 치아 내부의 죽은 조직을 긁어내고 뿌리 안쪽에 지지를 위한 쇠 막대기를 넣는 뭐 그런 시술이라. Wikipedia의 Root Canal을 검색하시면 자세한 설명이 나와요.

보리님: 크라운 벗겨야 될 상태라면 드디어 때가 온 것입니다. 물김치랑 육수 준비하세요. 정체불명의 상실감에 대한 마음의 준비두요. 전 이미 주사 맞고 제 책상으로 돌아가서 앉았는데 보리님 떨고 계신거 보이네요~^^

笑兒님: 네, 치과=고문과 같죠. 온갖 기계와 소음과… 무리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상태라 무제한 휴식모드에요.

이비님: 살아 돌아왔어요! 역시 세상은 참 아름다운, 그래서 살만한 곳이라는 기분이 새록새록 드네요~ -_-;;; 그리고 노래는 Hey Hude나 hello Goodbye로 대체하면 안 될까요?

비공개 1님: 원래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은 관상학적으로 치열이 고르고 예쁘다고, 엄마 몰래 훔쳐보던 여성지의 관상특집에서 본 적이 있답니다. 제가 제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치과 안 갈만큼 이 튼튼한 사람들이에요. 게을러서 안 가는 사람 말고…

비공개 2님: 원래 분위기 파악 잘 하는데, 아무래도 이번엔 제가 못한 것 같아서 얼른 자삭했습니다. 저도 그런 분위기라는 건 알고 있었거든요. 받으셨다니 다행이구요… 저는 영주권은 아직 얘기도 안 꺼내서 뭐 부럽다고 해야 할까요?

basic님: 요즘은 병원에 혼자 가는 것 정도는 아무런 감각이 없답니다. 뭔가 누구랑 같이 하면 더 어색한 요즘이에요.

 Commented at 2007/07/14 07:2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7/14 14:36 

비공개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