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youngyang-A Journey in North Korea / Guy Delisle (2006)

너무 가깝기 때문에 인식을 못하게 되는 것일까요? 미국에 살면서 가끔 유럽에서 찍은 북한에 대한 다큐멘타리를 보게 되는데, 그럴때마다 우리가 제공하는 식량을 비롯한 각종 지원들이 요구되는 상황들이 저의 상상력의 허용범위보다 열악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뭐 그건 아무래도 이러한 상황이 너무 오랜동안 고착되다 보니 다들 둔감해진 탓도 있겠지만, 북한의 진짜 실상(이렇게 ‘진짜’와 ‘실상’ 이라는 같은 의미의 단어를 중복해서 쓰는 이유인 즉슨, 저 역시 정말 어느 정도 열악한 현실이 북한의 진짜 열악한 현실인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이 우리의 현실이 허용하는 열악한 삶에 대한 잣대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확률이 높습니다.

퀘벡 출신의 프랑스계 캐나다 만화가 Guy Delisle이 그의 평양 체류(그는 프랑스 만화 제작 회사의 감독관 자격으로 북한의 작화 하청 품질관리를 위해 북한을 방문, 체류하게 됩니다)를 바탕으로 그려낸 만화책 ‘Pyoungyang-A Journey in North Korea’ 의 터치는 사실 그렇게 심각하거나 무겁지 않은데, 가장 큰 이유는 그의 행동 범위가 북한 정부에 의해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이 책에서 북한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얻을 수는 없지만, 그의 작화로 재구성된 북한의 (상대적으로 피상적인) 현실은 다큐멘타리등의 실사를 통한 그것과는 다른 맛 내지는 충격을 선사합니다.

의외로 담담하지만 그 저변에 깔려 있는 냉소적인 시각이 돋보이는 가운데, 그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자기가 본 김일성 부자에 대한 우상숭배의 장면들을 묘사합니다. 각종 건물이나 벽화 같은 것들이야 우리가 누구보다도 많이 보아왔으니 사실 아무런 느낌도 없을법 하지만, 실사와는 달리 그는 한글을 모르는 탓에 거의 모든 한글을 무슨 외계어나 상형문자처럼 그려내고 있는데 이 묘하게 무지의 의해 왜곡된 한글 아닌 한글과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의 선동을 위한 시각 예술(이런걸 예술이라고 칭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확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납니다…)의 조합이 빚어내는 낯설은 느낌은 끔찍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충격적입니다. 그것은 뭐랄까… 사실 우리가 한민족이기 때문에 때로 북한의 현실이라는게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한민족이 아니거나, 혹은 언어를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면 그 충격은 지금 느끼는 것보다 더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북한의 현실에 대한 다른 나라의 반응이 왜 우리의 그것과 다른지 예전보다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어설픈 결론도 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 일요일 아침에 생각했던 것보다 거창하고 심각한 화제를 가지고 글을 쓰려니 자꾸 비문을 빚어내는 느낌이 들지만, 책 자체는 별 흠잡을 데 없이 재미있습니다. 전체적인 작화의 느낌이 미국의 그것(모서리가 살아있는)과는 사뭇 다른 이유가, 그가 프랑스계라는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화인데다가 어려운 영어도 없어서 앉은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어나갈 수 있을 법한 책이었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이 생각의 실타래를 자꾸만 풀어 헤치기 때문에 의외로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P.S: 이런 책을 읽으면 늘 초등학교때 보았던 똘이 장군 생각이 나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게 됩니다. 북한군은 늑대, 김일성은 돼지…

 by bluexmas | 2007/05/14 00:04 | Book | 트랙백 | 덧글(3)

 Commented by erasehead at 2007/05/14 04:35 

가끔 ‘북한’에 대해서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내 대답은 ‘모른다. 아무 것도 모른다. 아마 나보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게 더 많을 것이다’ 입니다.

서슬 퍼렇던 유신과 5공 시절에 유년을 보낸 사람들 대부분이 ‘북한’에 관심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게끔 사상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이상하게 ‘북한’에 대한 모든 것은 긴장해야 하고 일단 피하고 싶은 심리가 있는 것 같아요. 그저 님의 말씀처럼 북한군은 늑대, 김일성은 돼지,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이 제일 쉽고 편한(?) 북한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Commented by bluexmas at 2007/05/14 09:29 

글쎄요, 지금은 긴장하거나 피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이런걸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멀리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죠.

 Commented by 불별 at 2011/05/21 00:58 

이 책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그 안내원에게 “장애인이 아무도 없네요..”라고 묻자 안내원이 정색하면서 조선민족은 세계최고의 단일민족이기에 그런 나쁜 피 따위는 없다고 말했다는 장면에서 좀 많이 무서웠어요.

지하철에서 읽고 있었는데 바로 앞에서 푸른 눈 할아버지가 이 책 지은이 이름이 프랑스 이름이라면서 갑자기 불어로 말을 걸어서 식은땀 흘렸던 기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