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탈리스트-왠지 모자란 캐릭터 발달
건축가가 주인공인 영화인데 에이드리안 브로디가 주연이고 제목은 ‘브루탈리스트’라면 나같은 건축전공자는 정말 꼭 봐야만 한다. 그런데 요즘 영상을 잘 못 보는 상태라 미적거리다가 홀연히 귀인이 나타나주셔서 같이 보았다.
볼 때는 ‘아, 좋다’라는 인상이 강했는데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감흥이 상당히 사그라들었다. 계속 곱씹어 보았는데 더 절절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무엇보다 캐릭터 발달이 덜 된 것을 배우들이 개인기와 연기력으로 메워준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주인공들은 핍박받은 유태인들인데 고통과 불행을 겉핥기로만 내재한다. 엄청난 희생자연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예를 들자면 가끔 조피아(주인공 라즐로의 배우자, 에이드리안 브로디 분)가 밤마다 골다공증으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설정이 그렇다. 그런 것보다 그냥 평범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정말 꿈에서도 상상을 못한 고통을 이를 북북 갈며 안으로 삼키는 모습이 더 설득력 있었을 것 같다.
이게 막간을 포함한 4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이나 비스타비전, 내가 좋아하는 세계2차대전 이후의 미국의 상, 그럴싸한 카메라 연출 등등을 모두 걷어내고 나면 남는 영화의 최종적인 인상이다. 부정적으로는 겉멋 같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 가지는 않겠다.
영화 속 건축은 제목만 듣고 넘겨짚을 수 있는 것처럼 브루탈리즘의 분위기를 많이 풍기지 않는다. 라즐로는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한 건축가라는 설정이라 당시의 기준으로 본다면 ‘울트라 모던’한 작업을 보여준다. 사진으로 보여주는 이전 작업도, 미국에서 설계를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반 뷰렌의 서재며 영화 속 프로젝트인 반 뷰렌 회관 또한 디테일이 하나도 없는, 차라리 르 꼬르뷔지에에 가까운 단일 구조물 monolith의 느낌을 풍긴다.
애초에 건축주인 반 뷰렌이 선호했을 대리석을 조금만 쓰고 싼 콘크리트-모더니즘의 대표 재료-를 고집한다는 설정이라 예산 문제로 다른 건축가가 감리를 핑계삼아 설계를 임의로 고치는 설정은 좀 앞뒤가 안 맞는다 생각했다. 건축주는 이것저것 다 하고 싶어했는데 이를 건축가가 모아서 콘크리트 다목적 공간으로 설계해 한방에 해결해주는 상황인데 왜 적자가 나고 건축가가 보수를 안 받고 설계 변경의 재변경에 그 돈을 쓰게 하는 것인가.
하여간 영화는 좋다. 좋긴 좋은데 뭔가 거장이 만들어 낸 불세출의 걸작 같은 걸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아, 전혀 그런 기대는 하지 않았다고? 내가 좀 김칫국을 많이 마셨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