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호텔] 라세느-K의 최전선
3월에 갔는데 최근까지도 고민하고 있었다. 쓸까말까? 물론 좋았다면 그런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너무 나빠도 글을 쓰기가 싫어진다. 언젠가는 한번 가야 되는데 생각만 하다가 마침 축하할 일이 생겨서 겸사겸사 밥을 여기에서 샀다. 그런데 와, 기대 안 했음에도 그 기대의 무저갱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수준이 형편없었다. 이런 걸 16만8천원이나 주고 먹는다고? 돈이 아깝다 말다 할 수준이 아니고,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수준의 음식이 사이좋게 모여있었다.
그래서 글을 쓸까말까. 잊고 있다가 어제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갔다가 집 앞 빽스커피에 들러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샀는데, 사장님의 나름 질서 깃든 추출 동작을 보고 다시 생각이 났다. 아, 그래 그 빌어먹을 커피가 있었지! 당시 식사를 대강 마치고 입가심하려고 커피를 가지러 갔는데, 직원이 미리 내려 놓은 샷을 얼음물에 부어 바로 내주었다. 일말의 고민조차 없어보이는 그의 움직임에 나는 속으로 할말을 잃었다.
그래, 에스프레소 샷도 미리 내려놓는다는 거지 16만8천원짜리 뷔페에서? 커피는 물론 전체의 수준을 감안하면 바로 내린 것이나 내린지 3분 된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만… 그래도 양심과 직업 윤리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테이크아웃 1천5백원인 컴포즈나 2천원인 빽스커피 등의 저렴한 프랜차이즈에서도 나름 고민과 질서가 깃든 동작으로 갓 내린 에스프레소를 물에 부어 내어준다. 그런데 한국 최고의 호텔에서 운영한다는 뷔페 식당에서 미리 내려 놓은 샷으로 커피를 만들어 내준다고? 이것이 바로 ”K’의 최전선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형국은 그냥 ‘K-푸드’도 아니고 ‘K’의 최전선이었다. 비린내 나는 냉동 게다리처럼 수준 낮은 음식을 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커피도 맛없는 강배전 원두 따위를 쓰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것을 손님이 많지도 않은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미리 샷을 내려 놓았다가 커피를 만들어 주는 수준은 되어야 그게 진정한 K의 최전선이다. 또한 이런 음식을 최고 호텔의 최고 뷔페라고 믿고 먹는 우리가 바로 K의 최전선이다.
물론 롯데는 그런 기업이고 롯데 호텔 식음료 수준도 딱 그 수준이기는 하다. 피에르 가니에르 서울이랄지, 지금 상호가 기억나지 않는 한식당 등등 다 일관적으로 그랬다. 엄청 고급스러운 척 하지만 후각적 요소가 전혀 가미되지 않은 라 세느 옆 델리카한스의 케이크도 그렇다. 그걸 먹고 무슨 벼슬에라도 오른 양 거들먹거리는 이들을 보고 나는 서글펐다. 내가 내는 돈으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고 또 해야 되는지, 수준조차 가늠을 못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라 세느에서 체험은 그 모두를 가볍게 비웃어 넘겨 주었다. 하, 그래 더 내려가자 내려가. 혹시 이 글을 읽고 ‘아니, 에스프레소 샷 미리 내려 놓은 게 그렇게 큰 일이야?’라고, 마치 내가 쓸데없이 트집을 잡고 시비라도 거는 거 아닌가 의심이 드는 분들은 커피와 에스프레소의 역사에 대해 상식을 쌓아 주실 것을 권한다. 현재의 한국은 나름의 커피 강국이다. 앞서 언급했듯 테이크아웃으로 1천5백원에 마실 수 있는 컴포즈 커피는 매우 훌륭하다.
이렇게 다들 고군분투하는 현실인데 16만8천원짜리 뷔페가 에스프레소마저 미리 내려 놓았다가 낸다면 양심이고 직업 윤리고 뭐고 다 내팽게친 꼴이다. 돈을 내고 음식점을 찾는 이들을 향한 심각한 모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