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의 포도

추석 직전에 포도를 한 상자 사놓고는 또 옛날 생각을 했다.

초등학교 4학년때 영세를 받았고 그 이듬해에 벌어진 일이었으므로 1986년의 추석 직전 토요일 오후였다. 아버지가 포도 두 상자를 형제 앞에 내밀고는 쪽지를 건네주었다. 두 사람의 영세 대부 집의 연락처와 주소가 적혀 있었다. 지금부터 집을 나가서 두 집에 연락을 하고 찾아가서 추석 선물인 포도를 전달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전화도 밖에 나가서 걸으라고 그래서 10원짜리 동전 두 개를 주홍색 공중전화에 넣고는 다이얼을 열심히 돌렸다. 네, 안녕하세요. 대부님이시죠? 저 00인데요, 다음이 아니고 추석이라 찾아뵙고 인사를 좀 드릴까 하는데요…

당시 우리집은 인계동이었고 두 사람의 대부는 기억이 이제 가물가물한데, 송죽동과 그보다 더 북쪽으로 먼 지역에 살고 있었다. 수원 지리를 아는 이라면 이 지역의 거리가 그렇게 짧지 않다고 알 것이다. 하물며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멀었는지 아직도 가끔 머릿속으로 이동 경로를 헤아려 보고는 얼굴을 찌푸리곤 한다.

하여간 그렇게 공중전화를 돌려 어색한 인사를 건네고 찾아가는 법을 물어서 간신히 두 양반의 집을 찾아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들이라고 해도 연휴 직전의 토요일 오후에 전화 한통 찍 걸고 찾아가는 게 과연 예의인지 모르겠지만 어른들은 친절하게 응대해주었다. 양쪽 집 모두에서 과일과 차를 대접 받고, 두 번째로 찾아간 나의 대부는 당시에 한창 씽씽 달렸었던 브리사로 우리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 먼 여정이 승용차로 단숨에 줄어들었을 때의 쾌감과 절대 원하지 않았던 과업을 어쨌든 마무리했다는 억지 성취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냥 영세 다음 해라 시켰던 것인지, 아니면 무슨 내막-부부싸움이랄지-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담스럽고 불안했던 과업은 단발성으로 그치고 말아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런 이야기도 참 많이 했는데, 나는 당시만 하더라도 모든 가정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이런 식의 과업을 교육을 위해 시키는 줄 알았기 때문에 대학 쯤 가서 절대 그렇지 않음을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나는 자라면서 그런 일들을 무시로 겪어야만 했던 걸까. 과연 그런 일들이 아이가 더 나은 인간으로 자라나는데 도움을 주기는 하는 걸까? 35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렇게 노끈으로 묶은 포도 상자를 들고 나름 안온했던 토요일 오후에 집 밖에 억지로 나가야만 했을 때의 불쾌함이나 모르는 동네를 찾아가야만 하다는 불안감 등을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그런 것 같지 않다.

이런 일들을 겪어야 근성이 생긴다는 생각에서 자꾸 시켰던 것 같은데, 자식들에게 그런 일을 시켰던 당시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은 지금의 나는 근성이 궁극적인 인간의 원동력이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된다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 나는 삼십 오년 이나 지난 지금도 추석만 되면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그렇게 자꾸 나서고 개입하지만 않았더라면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았을 것이라 믿고 있다. 그냥 한 사람이 다 망친 것이고 해가 지날 수록 그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