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의 삽질
가끔 어머니와 신세계에 가곤 했었다. 수원에서 1호선을 타고 올라와 서울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탄 뒤, 회현역에서 내려 일단 전체를 한 바퀴 돈 뒤 명동에서 순두부나 칼국수로 점심을 먹었다. 그동안 각자 보았던 물건-대체로 옷-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돌아가 최종적으로 구매를 하는 패턴이었다. 지척에 롯데, 심지어 당시에는 미도파도 있었지만 우리는 항상 신세계를 선택했다. 본점 본관의 고풍스러운 건물이며 대리석 계단 등이 특별한 경험을 한다는 기분을 안겨주곤 했다.
근 30년 쯤 세월이 지났다. 본점 본관 건물은 아직도 건재하지만 그것이 자아내곤 했던 신세계의 이미지는 이제 증발하고 없다. 물론 본관은 여전히 같은 이미지를 고수하고 있지만 그동안 생기고 또 사라진 나머지 것들에 눌려 인식의 주도권을 빼앗긴지 오래이다.
나의 분야인 음식 부문만 놓고 보더라도 신세계의 행보는 정말이지 한참 동안 실망스럽다. 무엇보다 높으신 분의 행보를 보건대 앞으로도 더 나빠질 질 확률이 매우 높다. 목동 SSG 푸드마켓이 갑자기 폐점한 이후 적어도 4년 동안 나는 이 글을 쓰려고 마음 먹었지만, 무엇보다 너무나도 재미가 없는 작업인지라 여태껏 미루고 있었다. 특정 화제에 대해서 이렇게 오랫동안 글쓰기를 미뤄온 것도 처음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그동안 느껴왔던 점들을 간략히 정리해 신세계의 삽질을 살펴보겠다.
1. 목동 SSG 푸드마켓: 처음 갔을 때부터 불길했다. 일단 매장이 넓지 않은 가운데 강남점에서 쓸데 없다 생각하는 요소(토끼 케이크…)까지 전부 욱여 넣어 어떤 부문도 선택의 폭이 다양하지 않았다. 게다가 입지는 더 나빴다. 안쪽 더 좋은 입지(지하철 연결, 아파트 단지 등등)에 넓고 쾌적한 현대백화점 목동점이 있으며 심지어 이마트도 멀지 않았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홈플러스마저 있다. 그런 가운데 역시 지하철역과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오목교를 건너자마자 자리 잡고 있으며 주차장 입구도 상대적으로 좁고 불편한 건물에 방문객이 많으리라 예상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런 점이 다른 동네에서 오는 나에게는 이점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예외라고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목동 깊숙히 들어가지 않고도 품질이 괜찮은 신선 식품류를 살 수 있어서 꾸준히 찾아갔지만 점차 그곳에서만 찾을 수 있는 물건이 줄어들고 그 자리를 피코크 제품들이 채우기 시작하자 느낌이 불길해졌다. 하지만 끝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빨리 찾아와서 놀라웠다. 10년 임대한 공간이라 들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2. 본점 신관 식품 매장 리뉴얼: 천장은 낮아지고 조명은 어두워졌다. 그 안에 모든 것을 욱여 넣어 미로처럼 느껴지는 가운데 신선식품의 비중은 낮다. 와인 매장은 보여주기 위주로 짜놓은 비싼 와인들의 진열장이 벽을 차지하고 있어서 역시 선택의 폭이 좁다. 그나마 리뉴얼 전에는 장을 열심히 보러 갔지만 지금은 거의 찾아가지 않는다.
3. 고속터미널점 식품 매장: 넓지만 역시 신선식품 매장은 상대적으로 좁고 불편하며 내가 마지막으로 자주 찾아갔을 때에는 냉동식품이 보강되어 더 선택의 폭이 좁아졌다. 딘앤딜루카는 과거가 되어 버렸다.
4. 레스케이프: 정말 총체적 난국이다. 일단 건축 전공자의 입장에서 매우 웃기는 건물이다. 겉은 타일을 붙인 싸구려 사무실 건물 같은데 내부는 키치에 가까운 앤티크 풍이라 둘을 한데 묶으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잘못 먹은 뒤 뱉어낸 결과물 같다. 시공상태도 건전하지 않아서 아울렛은 줄이 안 맞는듯 보였고, 남자 화장실 소변기의 장애인용 손잡이는 우격다짐으로 박아 놓은 볼트가 눈에 아프게 들어왔다.
그나마 서비스에 비하면 건물은 양반이라 더 서글펐다. 개장 후 1년 쯤 뒤, 어쩌다 라망 시크레에서 열린 갈라 디너에 초대 받았다. 초대장을 준 이도 초대할 사람이 없어서 나에게 물어본 상황이었다. 음식이야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조악했지만 진국은 지배인이었다. 파격적인 인사로 관심을 모았던 지배인은 식사가 한창일 때 홀을 돌면서 자기가 아는 이들에게만 인사했다. 서비스업 종사자의 직업적 태도라고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밖의 다른 사업체에 대해서는 그동안 써왔던 링크로 대신하겠다(노브랜드, 노브랜드 버거, 데블스도어).
나는 신세계가 백화점 가운데서도 최고의 식품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어왔었지만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 요즘은 현대백화점을 애용한다. 물건도 훨씬 좋지만 대체로 통로도 넓고 쾌적하다. 리뉴얼을 했더라도 촌스럽고 보수적인 느낌을 완전히 벗지는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인지 쇼핑 자체는 언제나 만족스럽다.
신세계는 대체 왜 이렇게 전락했을까? 내 기억이 맞다면 이마트가 창고형 양판점의 분위기를 표방한답시고 천장까지 상자를 쌓아 놓기 시작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 결과 매장이 전반적으로 어두워지면서 쇼핑의 경험이 덜 쾌적해졌고, 이후 피코크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신세계 본점 본관의 추억으로 운을 뗐지만, 그런 이미지를 고수해야만 한다는 게 아니다. 10년까지는 모르겠고 지난 7, 8년 동안 신세계는 무엇인가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 및 각인시키려고 부단히 시도를 해왔지만, 그게 무엇이며 누구를 노리는지 헤아리기가 어렵다.
노브랜드와 노브랜드 버거, 쓱배송, 더 나아가 삐에로마트 등을 떠올리면 밝고 경쾌하고 심지어 발랄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싶은 것 같은데 어딘가 모르게 겉만 핥고 대상에게는 닿지 않는 느낌이 강하다. 아주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깊이 경험해본 적 없는 의사결정권자들이 어디에선가 이미지만 그러모아서 사상누각을 쌓는 것 같다. 그래서 실패한 브랜드가 대체 몇 군데인가? 삐에로마트는 사라졌고 노브랜드도 당분간 가맹 사업을 중단한다고 한다. 오늘도 이마트에 가면 기름칠을 해 놓은 듯한 생산자의, 어색한 미소를 띠는 이미지가 곳곳에서 눈에 들어온다. SSG 푸드마켓을 출범하면서 내세웠던 것이지만 그들을 볼때마다 생산자가 아닌,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 같은 실화 바탕 드라마의 아마추어 재연 연기자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총체적 난국이라 규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진짜로 서글픈 이유는, 그래도 일상의 식품 쇼핑을 위해서는 이마트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홈플러스는 노력하지만 투박하고, 롯데는 영원히 논외일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이마트가 품질과 가격, 선택의 삼박자를 고루 갖추고 있는데 나는 이제 이것도 위협 받으리라 믿고 있다. 왜? 누군가가 오늘도 열심히 삽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한 명인지, 여러 명인지는 일개 음식 평론가가 대체 알 수 없겠지만 오늘도 신세계는 지금까지 실패한, 아직도 구축하지 못한 이미지에 대해서만 골똘히 생각하며 헛심을 쓰고 있는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