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트코] 베를리너 도너츠-레퍼런스의 질식사
지난 주 목금토 사흘 동안 코스트코에서 도너츠를 팔았다. 베를리너 도너츠란 이름 그대로 베를린에서 유래한 것으로 가운데에 구멍을 내지 않은 발효 반죽을 튀겨 속에 잼(젤리) 등을 채워 넣은 것으로 역사가 15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잼과 가나슈, 커스터드를 채운 세 종류가 각각 두 개씩 들었는데 너나할 것 없이 참으로 도너츠답다. 수입한 효모 발효 반죽은 좀 더 폭신하고 연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질기지는 않고, 필링도 도너츠를 압도할 만큼 채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빵 자체의 맛과 질감으로 먹을 수 있는 가운데 필링이 적당히 거드는 수준이다.
코스트코에서 딱 사흘만 파는 도너츠라고 해서 딱히 특별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기에 우리에겐 이미 레퍼런스가 될만한 도너츠가 널리고 또 널려있다. 독과점이기는 하지만 던킨 도너츠에서도 질은 낮을지언정 질기지 않은 발효 반죽 도너츠를 판다. 오히려 공업의 힘을 마음껏 발휘한 덕분에 꽤 가볍다. 크리스피크림도 한국에서는 확실히 좀 망가져 있고 인기도 별로 없지만 역시 질기거나 딱딱하지 않다. 결이 다른 음식이기는 하지만 제과점이나 시장 등에서 파는 생도너츠나 찰도너츠 종류도 바로 전 글에서 살펴보았던 지옥 도너츠 만큼 질기거나 딱딱하지 않다.
바로 이 사실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심지어 레퍼런스가 오랫동안 충분히 존재해 왔던 음식도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양 망가진 채로 등장한다. 이유가 뭘까? 전 글에서 분석했듯 식문화가 패스트패션처럼 전락하고 음식이 폰카의 피사체로 전락한 현실과 관련이 있다. 애초에 목적이 다른 곳에 자빠져 있기 때문에 레퍼런스를 따를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고, 이미 먹어왔던 음식을 활용할 생각도 못한다. 대체 어떻게 이처럼 똑같이 만드는지 참으로 신기하지만 외국에서 유행하는 것의 형태를 재현하는 데에만 몰입하느라 오감이 막혀 레퍼런스의 존재 자체를 의식도 못하거나 의식해도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그런 음식 아닌 음식이 더 그럴싸하고 더 비싸게 등장해 인스타그램을 타고 퍼져 기존 레퍼런스를 질식사시키고 멀쩡한 시스템을 잠식시킨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지독하고 황폐한 맛없음을 감수해야 한다. 이쯤되면 차라리 도너츠가 없는 세상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어진다. 우리가 정말 이런 음식을 먹으며 살 만큼 잘못했던가? 뇌에서 피가 날 때까지 헤아려 보아도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