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고통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에게 다가가서 요청해보라. 감정은 완전히 배제하고 상실의 경험 자체에 대해서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팩트’만 이야기해달라고. 왜? 궁금하니까. 정보 습득 차원에서 알고 싶어서. 백이면 백 당신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여러 갈래의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이게 핵심이다. 그런 경험은 전체가 감정이거나, 만약 아니라면 감정과 아주 촘촘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건조하게 ‘팩트’만 떠내서 이야기하기가 어렵고, 오히려 그런 시도가 요청 받은 사람에게 상처에 문지르는 소금 역할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요청을 받는다면 최선을 다해 응하려 들 것이다. 왜 그런 바보짓을 할까?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일단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있겠다. 사실은 거절해도 그만인데 상대방이 나에게 도움을 청했으므로 뭐라도 어떻게든 응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내적 능력이 허락하는 한 자신의 경험을 건조하게 전달하려 시도한다.

사실은 아예 안 될 이유도 없다. 그런 요청을 받은 게 처음이 아닐 게 너무나도 뻔하기 때문이다. 의외로 그런 것들을 ‘캐주얼’하게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당사자도 그러리라는 걸 몰랐으므로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점차 적응해간다. 적응이라 말했지만 사실은 포기에 더 가깝다. 어떤 의도에서 물었듯 사람들은 맥락에 관심이 없다. 맥락이 경험이지만 아무도 원하지 않거나 심지어 구질구질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더 웃긴 건 그런 경험이 구질구질하기 않은 확률은 매우 낮다.

그래서 요청에 응하기도 한다. 너무나도 구질구질하지만 그런 티를 내는 건 싫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지만 아무렇지 않은 티도 내보고 싶으니까.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한다고 해서 정말 아무렇지 않은가보다 받아들인다면 그건 당신의 문제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대체로 내가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혹은 상대방이 무엇을 겪었는지 모르더라도 건드리면 안될 부분이 있을지 모른다고 짐작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이렇게 말하니 엄청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무엇인가는 바로 ‘공감능력’이라는 명칭으로 유통된다.

한편 요청한 사람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응하는 경우도 있다. ‘뭔가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이야기를 꺼냈을 텐데 돌발적으로 대응하면 움츠러들겠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이런 경우를 많이 겪어 보았으므로 조건반사에 가깝게 반응하지만 사실 내부에서는 회의가 차오른다. 내가 왜 굳이 상대방을 배려해줘야 하는 걸까? 이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곱씹고 또 곱씹지만 그럴싸한 답은 아직도 끌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사실 더 고통스럽다. 굳이 터무니 없다고 생각하는 요청을 받아도 입을 열고야 마는 건, 이야기를 꺼내고 또 꺼내다 보면 원인이든 결과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국면과 감정이든 좀 더 또렷해지고 잘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바람과 반대로 세월이 흐르고 발화가 거듭될 수록 더 나빠진다.

그리하여 어느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을 만큼의 긴 세월이 흐르고 나면 세부사항은 시간의 바람에 풍화돼 사라져 버리고 직면하는 것만으로 괴로운 상실과 고통의 정수만이 남는다. 왜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을 못하거나 아예 세상을 떠나버려서 기억할 수도 없어져 버린다.

결국 그게 나의 일이었는지 남의 일이었는지도 더 이상 구분을 할 수 없을 만큼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상실과 고통을 건조하게 ‘팩트’로 기억하는 이들이 종종 다가와 새롭게 상기시킨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애초에 당사자에게 그저 ‘팩트’로만 기억될 일이었다면 그게 상실이나 고통일 리가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