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3_교정지와 머릿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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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안에 멋지고 놀라운 걸 심어 뒀는데 아직은 아무 것도 안 보이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알게 될 거야. 지난 금요일, 눈이 빠져라 교정지를 봐서 여섯 시쯤 보냈다. 평소라면 거기에서 일을 끊고 저녁 챙겨 먹고 잘 쉬었다가 다음 날 머릿말을 쓰는 게 순리이다. 그런데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모멘텀이 걸려 있는 상태에서 머릿말까지 써서 보내 버리고 문을 닫고 싶었다. 왠지 될 것도 같았다.

그러나 한 육개월쯤 머릿속에 그려 두었던 첫 단락을 쓰고 나니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제서라도 늦지 않았으니 일단 셔텨를 내렸어야 되는데 못해서 저녁도 굶은 채로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새벽 세 시 반, 눈도 안 떠지는데 말도 안되는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점심인지 아침인지 모를 끼니를 먹고 샤워를 하고 음악을 틀어 놓고 그냥 멍하니 앉아 있다가 여덟 시쯤 다시 잠들었다.

토요일 오후에서야 마음을 가라 앉히고 출발점으로 돌아가 메모를 써 정리해 놓고, 나가서 장을 보아다가 냉장고를 채워 놓고 저녁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다시 썼다. 그래봐야 여섯 권째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머릿말은 속을 썩이지 않았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왜 그랬을까? 누더기 같은 몸과 좀비 같은 마음을 억지로 눌러가며 쓰다가, 예전과는 달리 이 책에 무엇인가 감정이 북받쳤음을 확인했다. 책을 쓰는 과정이야 언제나 예상보다 좀 더 힘들어지기는 하는데 이번에는 내내 너무 많이 압축된 광경이 너무 빠르게 창 밖으로 지나가는 바람에 오랫동안 손아귀에 단단히 쥐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흔들렸다. 그래서 때로 치명적일 정도로 사소하게 보였었다.

그러는 내내 영화도 도저히 못 보겠어서 음악을 듣다가 맥 밀러까지 흘러갔다. 그의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를 우연히 보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신실함을 느꼈었는데 곧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가 마지막 공연이었다고. 이후 처음으로 영상을 다시 보다가 ‘2009’를 듣고 앨범을 틀어 놓았다. It ain’t 2009 no more. Yeah, I know what’s behind the door. 11시 56분에야 메일로 원고를 보내고는 소파에 웅크린 채로 한참 동안 그냥 누워 있었다. 창 밖의 풍경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언제나 남의 이야기가 아닐 2009년을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죽었고 어떤 사람은 아직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