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에는 미래가 없다

IMG_8577앞으로 매 명절마다 똑같은 글을 쓸 것이다. 차례에는 미래가 없다. 전통이랍시고 여성의 희생을 강요하는 한 차례에는 미래가 없다. 그렇다면 남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미래가 있는 것일까? 생각을 좀 더 해봐야 겠지만 현재 취사 혹은 가사노동 전반의 남녀 능력 및 숙련도 격차를 감안한다면 그런 시기는 적어도 근미래에는 오지 않으리라 본다.

게다가 가르치고 배우기 또한 만만한 일이 전혀 아니다. 이미 체득한 취사의 요령을 다른 이에게 구두로, 체계적으로 전수하는 일이 쉽지도 않을 뿐더러 과정도 가르치는 이에게 더 부담스럽다. 취사 무능력자에게 밥을 해 먹을 수 있도록 가르치는 과업은 부엌의 단순한 조리보다 훨씬 더 큰, 생활 전체의 재편성이고 거의 모든 경우 해 먹이는 이는 그냥 하던 대로 해 먹이면서 밥투정 안 듣는 수준에서 더 손대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일상 취사도 이런데 차례처럼 집약적인 과업이라면 가르쳐서 ‘도와주는’ 수준 이상으로 분담하게 만들 가능성이란 0에 무한수렴한다. 따라서 차례에는 미래가 없다.

명절마다 ‘차례상 복잡할 필요가 없다’, ‘000에서는 요 정도만 차리라고 추천한다’는 기사가 올라오지만 이 또한 의미가 없으니 차례에는 미래가 없다. ‘최소한’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하지만 형식은 형식이고 준수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은 거의 언제나 정해져 있다. 따라서 이를 완전히 없애지 않는 한 부담을 지는 사람은 바뀌지 않을 것이니 차례에는 미래가 없다. 상에 물 한 대접 올려 놓고 향이나 피울지라도 그 자체로 형식이 되어 누군가의 어깨에 오롯이 내려 앉는다. 따라서 차례상을 엎어버린 뒤 주민센터에서 딱지를 받아와 쓰레기로 내놓을 때까지 현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남성이 장을 봐온다고 달라지지 않고, 선심쓰듯 음식을 준비했으니 여성에게 절 할 권리(?)를 “배려”해준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취사, 혹은 가사 노동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더러운 고정 관념을 학습 받아 애초에 부엌과 정서적인 연결 시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교육 받아온 남성 가문의 죽은 이들을 위한, 그리하여 당장 살아 있는 또한 만드는 이의 입으로 바로 들어가지도 않는 음식을 여성이 만들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사실은 너무나도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또한 조상과 궁극적으로는 그에 딸린 구복 의식인 차례의 멍에를 이제는 벗어버릴 때도 되었다. 우리는 현대인일 뿐더러 한편 또 다른 구복의 매개체인 종교도 한 쪽 어깨에 짊어지는 경우가 많으니 사실은 이중으로 부담을 지는 셈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차례, 더 나아가 제사의 실행 및 구현이 궁극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뉘앙스-케케묵은 시절의 신분제-로 부터 자유로와져야 한다. 따라서 차례에는 미래가 없어야 하고 그 시점은 지금 당장이어야 하며 실행자는 여태껏 혜택을 입은 남성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