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문화)의 물
끝도 없이 길어져 결국 다음을 기약했지만 사실 ‘한식의 품격’에는 물에 관한 이야기 또한 수록되었어야만 했다. ‘한식의 물’ 말인데, 단지 한국 음식 뿐만 아니라 한국 식문화 전체에서 물의 위상이랄지 쓰임새 혹은 존/부재의 문제점에 대한 고찰이다. ‘수분’이라고 생각하면 좀 더 범위가 넓어지겠다.
아주 간단하게 한식의 물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류는 ‘의도적인 물’이다. 원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물로 마시는 물과 음료, 그리고 한식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과 비중을 차지하는 국물이 여기에 속한다. 의도적인 물의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는 품질과 조화를 꼽는다. 품질은 말 그대로 한국의 식문화 전반에서 제공되는 물의 수준을 의미한다. 현재 무료로 제공되는 물이 과연 먹을만 한가? 맛도 맛이지만 요즘 한식의 물의 제공되는 여건에 주목한다. 정수기(라고 믿어야 속이 편한 무엇인가)를 거쳐 수저처럼 공용 물통에 담겨 식탁에 대기하고 있다가 살균소독기(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어야 속이 편한 무엇인가)를 거친 스테인리스 물컵에 담겨 나간다. 맛있다고 할 수 없는 물의 질이 한층 더 낮아질 수 밖에 없는 여건이다.
의도적인 물의 두 번째 부류는 돈을 주고 사서 마시는 물과 음료수 가운데 국산이다. 첫 번째 의도적인 물의 맛과 여건에 조화를 덧붙여 생각할 수 있다. 현재 한국에서 사마실 수 있는 국산 물과 음료는 한식과 어울리는가? 요즘의 한식을 ‘점액질의 달거나 매운, 혹은 그 둘이 어우러지는 양념으로 맛을 낸 음식’이라 규정한다면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물 자체가 중립적이므로 이런 음식을 씻어 주기에 역부족인 가운데 대체로 ‘바디’가 빈약한 국산 물이 특히 더 제 역할을 못한다.
그렇다면 음료는 어떨까? 그나마 물에 유사하므로 편입되는 ‘차’ 종류를 따져볼 수 있을 텐데, 사실 물보다 더 의심스럽다. 맛을 논하기 이전에 그것들의 기원이 어디인지 헤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먹는 샘물 이전에 식수 대신으로 썼던 옥수수나 보리 등의 곡물차도 아니고 녹차 같은 보편적인 종류도 아니다. 과연 이런 차 음료는 식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기 위해 등장한 것일까, 아니면 공급이 수요를 장려하기 위해 나온 상품일까? 그저 맛만 놓고 보더라도 정체 불명의 유사 구수함에 비타민 씨 같은 보존제의 신맛의 꼬리가 긴 패턴은 그 자체로 유쾌하지도, 현재 한국에 유통되는 음식과 어울린다고도 보기는 어렵다.
한편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하는 음식과 음료의 궁합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한식에 어울리는 음료가 있는가? 있다면 우리는 외식의 현장에서 그것을 돈을 주고 적극적으로 사먹을 것인가? 이런 글에 달리는 반응을 보면 그럴 것 같지 않다.
의도적인 물 가운데 마지막 부류는 국물인데, 이미 책에서 그럭저럭 다뤘으므로 동어반복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다만, 이 국물이 현재 우리가 먹는 음식의 맛의 강조 또는 약화 가운데 어느 역할을 맡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고민해 볼 필요는 있다. 강조를 위해 먹는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약화를 시키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국물 자체를 좀 더 치밀하게 ‘설계’하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라 믿는다. 한편 한국식 양식이라면 흥건한 파스타 소스처럼 유화에 실패한 물이 미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일종의 만성 질환이랄까.
다음은 ‘의도적이지 않은 물’이다. 말 그대로 음식과 요리의 최종 결과물에 존재하면 안되지만 부주의나 무지 등으로 방치되고 마는 물이다. 꼽아보면 굉장히 많은 물이 입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생채소가 빈번히 등장하는 식단이므로 한결 더하다. 온갖 쌈채소들 말이다. 물론 다량으로 손질하므로 수분 관리가 어려울 수도 있지만, 대체로 수분 자체를 없애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나마 한 장 혹은 한 쪽씩 개별적으로 먹는 경우라면야 잉여 수분의 영향력을 최소화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도 더더욱 방치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런 채소로 샐러드 같은 요리를 만든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한편 채소를 놓고 또 다른 범주의 물 혹은 수분의 관리 태만을 생각해볼 수 있다. 절이기부터 삶거나 데치기까지 이르는, 온갖 조리로 발생하는 물의 관리 말이다. 절이고 삶고 데치는 등, 불을 대든 대지 않든 채소의 조리는 한편 수준의 관리를 통해 원하는 맛이나 질감을 끌어내는 것이 목적인데, 실제로는 이 수분의 처리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술 더 떠 아예 관리 자체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경우도 허다하다. 과연 무침 같은 것을 채소를 절이지 않고 만들 수 있는 걸까? 대체로 채소의 맛이 밍밍한 현실까지 감안한다면 맛이 아닌 조리의 편의 차원이라고 밖에 볼 수가 없다.
삶거나 데친 채소의 수분 또한 전반적으로 관리가 잘 되는지 의심스럽다. 이를테면 시장에서 삶아 파는 나물 같은 것을 생각해보자. 대체로 손아귀로 뭉친 듯 둥근 형태로 좌판에 올라 있는데, 이는 정말 두 손 사이에 넣고 짜서 물기를 빼려 시도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조치가 과연 효과적일까? 구체의 안쪽으로 갈 수록 물기가 많이 남아 있을 뿐더러, 짜면 짤 수록 바깥쪽 켜의 채소는 물크러지기 쉽다.
가끔 이 모든 의도 혹은 의도치 않은 물이 식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생각한다. 각각의 가정 혹은 생활 단위에서는 한두 방울, 많아야 한두 컵에 불과할 물이 사실 의식 속에서는 이미 한 곳에 모여서 넘실거리며 한국 식문화의 맛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