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돈까스집
가끔 돈까스가 먹고 싶어진다. 사실 그리 만들기 어려운 음식은 아니다. 숙성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다 덧없고, 적당한 등심을 사다가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뒤 밀가루(전분)-계란물-빵가루의 순으로 옷을 입혀 냉동시키면 끝이다. 등심 1kg분을 만드는데 두 사람의 손이라면 20분이면 충분하다. 요령은 ‘더러워지는 손’과 그렇지 않은 손 구분하기다. 사람 손이라는 고기도 밀가루-계란물-빵가루를 거치면 옷을 두툼하게 입는다. 이때 한 손만 옷을 뒤집어 써야 한다. 그래야 운신이 자유로운 다른 손이 나머지 과업을 전담한다.
여기까지는 별 번거로울 게 없는데, 역시 튀김이 문제다. 돈까스 한두 쪽을 튀기자고 한 솥 가득 담긴 식용유를 데우고 있노라면 때로 허무해진다. 이래서 뭐 남는 게 있나. 게다가 언젠가는 기름을 처리해야 한다. 무거운 무쇠솥을 들고 나가야 한다. 한없이 귀찮을 수 있다.
그래서 요즘은 웬만하면 돈까스는 밖에서 먹으려 한다. 문제는 집 주변에 파는 곳이 없다는 점이다. 딱 한 군데가 있다. 점심이면 적당히 직장인으로 붐비는 지역 어딘가에 다닥다닥 붙은 음식점 가운데 한군데다. 10석짜리 완전 동네 장사 돈까스 풍-무엇인지 쉽게 상상하실 수 있을리라. 쇠락한 꽃동산?-의 인테리어를 40석 정도 규모로 뻥튀겨 놓아 어딘가 모르게 어설프고 또 어색해 보이는 이곳에서 진지함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바로 ‘브레이크 타임’이다. ‘더 나은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오후 3:00~5:00 쉽니다.’ 그리고 나는 어느 날인가 주인으로 알고 있는 남자가 그 시간대에 가게 앞에 앉아서 책장 넘기는 광경을 보았다. 그는 평상복에 반바지, 그리고 맨발 쓰레빠 차림이었다. 발가락 털이 길었다.
언제나 그런 차림이었다. 실제로 돈까스를 먹으러 가고 또 갔을 때에도 그는 그렇고 또 그런 차림이었다. 계산대 근처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보아 주방에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식탁은 끈적끈적하고 나무인지 수지인지 알 수 없는 통에 담긴 포크와 나이프는 이미 광택이 전혀 없고 몇몇이 구부러진 것으로 보아 제 2, 혹은 3의 삶을 사는 게 분명해보였다. 한 번은 ‘브레이크 타임’ 직전에 가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식탁의 끈적거림을 도저히 참지 못해서 한 번만 더 닦아 달라고 요청했다. 남자는 쓰레빠를 찍찍 끌고 다가와서는 행주로 식탁을 한 번 휙 훑고 간다. 그래서 가실 끈적거림이었다면 애초에 끈적거림조차 아니었을 것이다.
곧 남자가 다시 쓰레빠를 끌고 식탁으로 다가온다. 돈까스가 나왔다. 식힘망 같은 곳에서 단 1초도 쉬지 않고 튀김솥에서 바로 접시로 넘어왔는지, 표면이 지글거린다. 거품도 끓어오른다. 반으로 갈라 얇게 편 고기라면 사실 조리의 여부는 애초에 신경을 끊어도 완전히 무방하다. 어떻게든 익어버릴 것이다. 오히려 겉이 더 결정적일 수 있다. 진한 갈색은 과조리를 의미한다. 지글거리며 거품을 끓어올리는 표면은 이미 바삭함과 작별을 고한지 오래다. 푸석하고 딱딱하다.
포크와 나이프를 대면 눈의 결정을 몇 십배 확대시켜 놓은 모양의 빵가루가 절반쯤 버석거리며 접시로 떨어진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입으로 들어가 천장을 사정없이 긁는다. 잠깐, 아직 식지도 않은 돈까스다. 뜨겁고 또 꺼끌꺼끌하다. 입천장은 어떻게든 분명히 벗겨진다. 당신이 돈까스를 찾아 헤맨 대가로 입는 상처다. 물론 인내심을 지닌 이라면 돈까스가 식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한 번은 정말 기다리려고 했다. 온도가 내려갈 때까지, 돈까스 본연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때까지. 그런데 바로 옆자리의 50대 후반 남성이 신발을 벗고 반대쪽 다리에 발을 올려 놓고 밥을 먹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주인의 쓰레빠 신은 발등이,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옆자리 남성의 양말 신은 왼발바닥이 보였다. 최대한 빨리 먹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면 튀김옷을 죄 벗겨내는 특단의 조치도 있지만 그 또한 막대한 노력이 필요하다. 낡고 구부러진 포크와 나이프로는 좀 역부족이다.
7,000원인지 8,000원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런 걸 보면 아마도 7,000원이 맞을 것이다. 돈까스를 시키면 작은 공기에 담긴 쫄면이 딸려 나온다. 물기가 덜 빠진 면 위로 빨간 양념이 질척거린다. 남기기 싫으면 이미 벗겨진 입천장으로 열심히 밀어 넣고는, 역시 딸려 나오는 조미료 국물을 들이켜 마무리한다. 입천장의 상처에 고인 감칠맛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어나 카드를 내민다. 혹시 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계산대를 흘끔 들여다 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맛있게 드셨어요? 네에. 내일 모레면 마흔 넷인데 이 정도 거짓말은 쉽게 할 수 있어야지. 세 번인가 가고 나는 이제 더 이상 그곳에 가지 않는다. 돈까스를 먹겠다는 생각도 접었다. 인류애를 잃는 건 참으로 슬픈 일이고 하찮다면 영영 하찮을 음식 때문에 그러면 더더욱 안된다. 그러나 한국의 서울에 살다 보면 그럴 기회가 정말 많다. 한낱 7,000원짜리 돈까스 때문에 당신은 슬퍼지고, 새벽까지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것은 음식이 아닌 것 같고, 당신은 인간이 아닌 것 같다.
결국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곳의 주인이 읽던 책이 ‘돈까스의 비결’ 같은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럼 더 무섭고 참혹할테니까.
오늘 글은 눈물없이 읽을 수 없는 글이네요.
애초에 동네 가게란 것들이 좋은 음식을 먹자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만(이것도 이미 슬픈 일이지만), 요즘엔 특히나 더 ‘이런 음식’ 이 아니라 ‘대충 이렇게 하는 음식’ 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첨예한 노력이 있으면 놀라운 음식이 있으면 좋겠고, 적당한 노력과 성실함이 있다면 안정적인 음식을 모든 사람이 접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처절한 에세이 눈물겹습니다.
세 번이나요…?
세번이나 가셨다니.. 인류의 돈까스를 향한 사랑은 역시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