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해상도와 식음료 짝짓기의 비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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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나는 식음료 짝짓기에 대한 낙관주의를 고수해왔다. 일단 음식은 무엇이든 맹물 외의 음료와 먹을 때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더 맛있으며, 설사 술이 아니더라도 세상에 별처럼 많은 게 음료니 어떻게든 걸리는 짝이 있을 거라 믿어왔다. 그런데 요즘은 그 생각이 흔들린다. 짜여진 짝짓기가 여전히 흔치는 않지만 그건 일단 논외다. 그보다 느슨한 프로그램은 존재하니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론적으로는 맞는 기본 짝을 얼마든지 고를 수 있다. 첫입부터 목구멍으로 넘어간 다음까지 꼬리를 물며 공명하는 수준의 여운까지는 아니더라도 각자의 장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짝은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고,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특히 양식이라면 음식과 경험의 의미나 정체성이 걸린 일이고, 이를 전담하는 직원도 존재하는 상황 아닌가. 하지만 그 모든 메뉴와 짝짓기가 경험의 영역에서 이론과 일치하기에 주방 밖에서 미치는 영향이 이제 너무 큰 것은 아닌가 회의를 품는다. 한마디로 재료부터 형성하는 맛의 바다를 건너 오는 와인이나 맥주 등의 음료와 짝을 짓기에 너무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가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말이다.

제품에 따라 생산의 규모나 접근 방식 등이 제각각이지만, 크게 보아 음료 특히 주류는 기성품이다. 맛이 이미 철저하게 통제 및 결정된 상태에서 밀봉되어 바다를 건넌다. 과연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이 기성품 생산의 가장 큰 그림에서 대전제로 삼고 있는 맛의 영역 안에 조금이라도 발을 걸치고 있는 것일까? 앞에서 밝힌 것처럼 나는 지금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다고 믿어 왔으며, 어쨌든 음료는 무수히 많으니 좀 어려울 지언정 고를 수는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왔다.

그런데 올 여름, 정말 너무나도 맛이 없는 과채류를 접하면서 그 생각이 흔들렸다.  물론 한국의 과채류는 그다지 맛있지 않다. 백만 번쯤 말해왔지만 단맛만 강조되는 한편 굉장히 흐릿하다. 채소는 애초에 단맛을 내세울 수 없으니 그냥 흐릿하고 흥건하며 묽다. 채소를 좋아하지 않는 게 당신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맛이 있어야 먹지. 그러나 올해는 기후 여건 때문인지 그 단맛마저 흐릿해져 평년보다도 더 맛이 형편없었고, 소위 ‘맛의 해상도’가 이젠 너무 다른 세계로 가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IMG_0127어떤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예로 들어보자. 그걸 미덕이라 말할 수 있을지 확신이 좀 없지만, 이곳의 음식은 성실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한편으로 파씨오네와도 느낌이 비슷하다. 성실함은 음식 전체를 책임지는 미덕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때로 경험 자체가 불쾌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안전장치 역할은 할 수 있다. 한국의 현실에서 이것은 슬프든 아니든 미덕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라구 등 조리 과정이 자동적으로 맛의 켜를 입히는 음식을 비롯해 육류 요리는 비교적 만족스럽다. 하지만 이런 음식들에서도 전체를 관통하는 ‘한 발짝의 아쉬움’이 존재한다. 조금 더 표정이 강하면 좋을 텐데. 현상보다 나는 언제나 이유에 더 관심이 많다. 그렇지 못한 이유는 과연 1. 셰프의 자발적인 선택인가, 2. 소비자의 욕구를 반영한 것인가, 3. 어느 쪽도 의식하지 않았고 다만 습관의 산물인가? 몇 번의 경험에서 나는 이에 대해 계속 생각했고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한편 과채류를 쓰고 조리가 복잡하지 않은 음식, 말하자면 전채류에서는 아쉬움이 한 발짝에서 그치지 않는다. 때로 음식 전체를 지배한다. 때로 산이나 소금, 기름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전채류는 하나의 음식이라기보다 재료의 나열이라는 인상을 풍겼고 음료, 특히 와인과의 조합이 이론 만큼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마디로 이미 정해진 술의 해상도에 음식이 압도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무화과나 청귤 같은 재료는 상상의 세계 속에서는 군침 넘어가게 만드는 식재료지만, 현실의 식탁에 오르면 김이 빠져버릴 수 있다.

이것을 특정 음식과 특정 음료의 조합 문제라고 보아야 할까? 그럴 수 있다면 마음이 굉장히 편할 것 같다. 그저 맞는 짝을 또 열심히 찾으면 된다. 하지만 맥주나 소주 같은 술에서 보여주는 맛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 어찌 되었든 ‘한국적인 맛’은 분명히 존재하며,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 맛은 ‘질펀한 주변부+빈 중심부’와 같은 형국으로 시각화할 수 있다. 이런 맛이 과연 우리에게 진정한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는 걸까. 사실 이런 수준까지 고민을 해서는 안된다. 자칫 잘못하면 다른 세계는 애초에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이야기로 오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그래서도 절대 안되지만, 사실은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고립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은 지울 수가 없다.

6 Responses

  1. R says:

    전 2번이 가장 크다고(80%정도?) 봅니다. 아무래도 한국사회가 저신뢰…사회라고(들)하는것도 있고, 뭔가 재료를 가공하면 가공할수록, 풍미나 향취가 강해질수록 무언가 (싸구려 재료를 감추려는)속임수나 꼼수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주위에 참 많죠…

  2. 111 says:

    상투적인 말씀인지는 모르지만 복합적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최종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1차 식재료인 농축산물의 품질이 별로이다보니 요리에도 한계가 있는 것 같고, 이를 소비해주는 대도시 소비자들의 취향 자체의 문제도 있으니 요식업자들이 어쩔 수 없이 그에 맞춰야 하는 경우도 있고요. 특히 한국의 과채류는 스스로 하나의 요리를 책임지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3. 종이사진 says:

    한국 과채료의 맛이 형편없다는 인식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같습니다.
    동남아 여행가서 망고만 먹지 말고 그동네 토마토나 오이만 먹어봐도 생각이 달라질텐데.

  4. 정원작가 says:

    1. 3번
    1.1. 사회적 관습(개인적 차원인 습관이 아닌) 때문입니다.
    1.2. 저는 막장 드라마에 빗대서 설명하고 싶습니다.
    2. 한국에서 건국 이래 유례가 없는 막장 드라마가 최고 시청률을 점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1. 방송사(식당), 작가와 피디(식재료 공급자와 조리사), 시청자(손님)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2.2.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이 그냥 한국사회가 막장이기 때문입니다. (쓰레기 장에서 조리하면 쓰레기 수준의 음식이 나옵니다)
    2.3. 좋은 대본(식재료)은 비싸서 구하기도 힘들고, 어렵게 구해 힘들게 만들어도 잘 팔리지 않습니다. (낮은 시청률) 경쟁 업소(타 방송사)의 더 자극적인 메뉴(X막장 드라마) 의식해서 더더 자극적인 메뉴(XX막장 드라마)를 만들어야 잘 팔립니다. (광고주를 만족할 시청률) 새로운 시도를 했다가 삐꺽하면 경쟁이 치열한 이 바닥에서 한 방에 훅 갈 수 있죠.
    3. 저출산고령화로 대표되는 활력은 없고 분노만 남은 한국사회에서 다른 영역처럼 조리업계의 진화도 요원한 일입니다.
    3.1. 유명 조리사(쉐프)들이 TV에 자주 나오지만 한국의 식문화는 어떨까요.
    3.2. 맨날 TV로 보기만 하지 주방에서 요리를 하지 않습니다.
    3.3. 한식 세계화 류의 뻘짓을 반복하겠죠. 관련 종사자들도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4. 한국인들이 음식 엑소더스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4.1. 맛을 찾아 세계를 떠돌죠.
    4.2. 맛있게 먹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려서 자랑질도 하고.
    5. 저 또한 예외가 아니라서 조만간 외국에 자주 나갈 계획인데 낯선 땅에서 만날 이국적 식재료와 음식에 관한 기대감으로 들떠 있습니다.
    5.1. 예전에 음식이란 그저 배고픔을 채우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한국인 해외 여행자들의 맛집 순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5.2. 최근 음식과 조리의 세계에 본격 입문한 이후 집에서 음식과 조리에 관한 책을 구해 읽고 유튜브에서 레시피를 찾아 조물조물 만들어 먹으면서 생각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5.3. 21세기 무적자/無籍者인 제가 어린 여자들처럼 음식 사진 찍어 SNS에 올릴 수는 없습니다만 오감으로 음식의 풍미를 즐기고 올 예정입니다.
    5.4. 길거리 음식부터 고급식당까지 두루 먹어보고 올 예정입니다.
    6. 생업으로 음식을 먹고 비평해야 하는 주인장의 노고에 비해 식도락 초보인 저에게는 매일이 즐거운 나날입니다. 언젠가 어떤 한계에 부딪히게 되겠지만 그때까지 음식의 풍미를 즐기고 싶습니다.

  5. jeeseob says:

    대형마트의 유통속도에 맞추어 재배도 그렇게 되었는지 식재료의 상태가 진공상태에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