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의 품격’과 적폐 청산의 텔레파시
바로 어제, 지인과 동부이촌동에서 저녁을 먹었다. 굉장히 오랜만의 지역방문이어서 아무런 생각이 없는 가운데 어딘가의 중국집에 자리를 잡았다. 중식냉면과 해물볶음밥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눈에 들어오는 주방 안에서 바삐 웍이 움직이는 걸 보고 후자를 주문했다. 그리고 조금 늦다 싶은 타이밍에 사진의 밥이 등장했다. 한가운데 놓은 낙지 다리의 인상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완전히 죽어버린 계란이 범벅인 밥을 한 숟갈 뜨고, 나는 지인의 동의를 얻은 뒤 그대로 일어나 계산을 하고 퇴장했다. 직업인이 아닌 생활인으로서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음식을 먹은 뒤 맛의 있고 없음을 패턴이나 유형으로 분류해 저장한다. 모호한 분류나 경계는 상존하지만 음식을 일련의 요소가 상호작용한 결과물로 인식 및 이해한다. 이만하면 특히 맛없음의 패턴은 대강 다 채웠다고 믿고 있을때 상존하는 것들과 꽤 다른, 새로운 맛없음이 등장한다. 이런 맛없음은 머릿속에서 처리도 잘 안 된다. 몇날 며칠을 램에 자주 쓰는 프로그램 띄워놓듯 머릿속에 올려 놓고 헤아려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하긴, 인간이 먹을 음식이라기 보다 사료에 더 가까운 수준이었으니 처리가 안 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음식을 만날 때마다 일종의 자괴감이 씻겨 나간다. 종종 이 모든 일이 ‘제 얼굴에 침 뱉기’라고 여겨질 때가 있다. 또한 내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우려할 때도 있다. 한편 직업인으로서 그런 고민이나 자기 반성(또는 성찰) 등이 당연히 필요하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지만 평가 및 비평이 하필 음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때로 더 피곤하다. 실시간성을 포함한 육신성이 모두를 한층 더 예민하게 만든다. 하지만 종종 저렇게 밥이라기보다 사료와 같은 음식이 등장해 내가 한국인으로서 안 느끼고는 배겨나지 못하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싹 휩쓸어 가져가 버린다. 말하자면 더 큰 불행이 나타나 기존의 불행을 집어 삼켜야 잠시 느끼는, 지독한 아이러니의 안도감이다. 물론 잠시 후면 더 큰 불행이 스멀스멀 잠식할 것이다.
굳이 사료와 같은 볶음밥을 소환하는 이유는, 바로 ‘적폐 청산’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44개월만의 후속작 ‘한식의 품격’의 소개글인데, 기본적으로는 무엇인가를 길게 늘어 놓을 생각이 없었다. 원고지 2,000장, 532쪽이 된 책이니 더 이상 붙일 말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 일부의 지독한 비웃음을 사기도 했던 ‘가상 인터뷰’도 없다. 나 혼자 말할 기력도 없는데 가상의 나까지 끌어낼 여력은 더더욱 없다. 그래서 이것 한 가지에 대해서만 ‘한식의 품격’위에 말을 얹는다. 적폐 청산 말이다.
사실 오랫동안 적폐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왔다. 머릿말에 등장했었다. 산지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나가지만 ‘한식의 품격’의 출발점은 의문이었다. 한국의 식문화에서 어디까지가 전통이고 또 어디까지가 습관인가. 책을 써 나갈 수록, 나는 검증되지 않은 습관이 전통의 이름으로 또아리를 틀고 오래 버티고 앉아 있었고 그 결과 적폐가 되어 한국인의 식생활에 고통을 안기고 있다는 심증을 굳히게 되었다. 효율적이지도 않고 맛도 없다.
그랬다가 작년 말부터 온갖 일들이 일어나고 적폐라는 단어가 정치적 함의를 강화한 채 전면에 등장했다. 말하자면 유행어가 된 것이다. 시류를 타고 싶지 않을 뿐더러 정치 및 진영 논리가 맛 이전에 음식의 담론을 부정적으로 잠식하는 한국의 상황에 큰 불만을 느껴왔으므로, 그에 반하는 시각으로 들여다 보는 방법론을 제시하는 책에서 정치적 유행어를 쓸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관련 대목을 모두 걷어내고 머릿말을 다시 썼다.
혼자 이렇게 생각하며 쓰고 지운 머릿말을 보냈는데 편집진에서 띠지의 문구에 ‘적폐 청산’을 채택했다고 알려왔을때, 나는 이것이 결국 흐름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는데 텔레파시라도 통한 건가. 연필로 썼다 지운 원고처럼 자국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닐텐데 들어낸 표현이 다시 등장했을때, 더 이상 말을 보탤 필요가 없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네, 적폐 청산을 합시다. 이 책은 적폐 청산을 위한 것입니다. 이제 섶이라도 챙길 타이밍인가, 주섬주섬? 저, 이제 곧 뛰어들 예정인데 미리 불이라도 좀 붙여 주시겠습니까?
그래서 대체 무엇이 적폐란 말인가? 그에 대해서는 책이 열심히 말해줄테니 더 이상 숟가락조차 얹고 싶지 않다. 책을 쓰는 동안 끝없이 고민했지만 결국 답은 아주 간단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음식의 적폐는 음식 만의 적폐가 아니다. 사회의 적폐가 음식에 스며들어 영향을 미쳤다. 과연 어떤 적폐인가. 실패한 근대 및 현대화의 적폐다. 원리와 개념을 이해할 정도로 시간을 들이거나 모방을 시도하지 않고, 겉만 핥아 최단기간 최대한의 성과를 내기 위한 시도에 몰두한다. 그 결과물이 쌓여 한때 찬란해 보였다. 그러나 이제 다 무너지고 있다.
책을 쓰는 3년 동안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참담한 일들이 벌어졌고 결국 정권까지 바뀌었다. 그 시간 속에서 과연 음식이 멀쩡할 수 있었을까? 그럼 2017년에 서울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동네 가운데 하나에서 사료에 9,000원을 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원리며 개념 등등은 언제나 거창하게 들릴 수 있다. 이것을 음식과 얽어 들먹이려는 시도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다 좋다. 전부 상관 없다고 치자. 그 거창한 단어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은 차원에서 인간이 먹을 수조차 없는 음식을 음식점에서 판다. 그 현상 자체가 바로 적폐다.
매체 서평 모음
주먹구구 판치는 한식에 ‘하이킥’ (중앙 SUNDAY) / 한국인은 왜 집밥을 차려 먹기 힘들까 (머니투데이) / 책꽂이 (서울신문) / “냉면, 그렇게 먹는 게 최선입니까” (조선일보) / [책의 향기] 레시피 대신 ‘손맛’? 날카로운 한식 비평 (동아일보) / [책 속으로] 1인당 연 74개 먹는 라면이 가장 한국적 음식? (중앙일보) / 값 비싼 평양냉면, 이유 있는 항변 (서울경제) / 김치 없인 밥 못 먹는다? 한식 맛 모르시는 말씀! (매일경제) / [200자 다이제스트] 한식의 품격 (헤럴드 경제) / [책과 길] 애지중지 키운 한식에 거침없는 회초리 (국민일보) / 한식을 전통이란 굴레에 가두지 말라 (부산일보) / 음식평론가 이용재가 한식이란 ‘밥상’을 엎은 이유 (연합뉴스) / [새 책] 한식의 품격 (뉴시스)
근데 어서 뮐 드시고 왜 그런지 좀 구쳬적으로 적어 주셨으면 합니다.애꿏은 동부 이촌동의 중국집이 피해를 보면 안 되잖아요.배려가 없는 주관적 평가이신듯 합니다.
구체적으로 적으면 그 집 망하라고 이러는 거냐는 댓글이 달리겠죠.
위에 사진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시는지? 맛보기도 싫어지는 저 비주얼을 보자니 충분히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신것 같은데요..
일단, 블루마스 선생님 신작 잘 읽고 있습니다.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가운데 맛있는 것 한 번 먹기 힘든 현실이 답답하기도 합니다! 모쪼록 실무자들이 블 선생님의 책을 읽고 적용하는 날이 속히 오길… (위의 기운 쪽 빠지는 댓글이랑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잘 안 쓰던 댓글 답니다)
낙지다리가 원래 계획에 있던 조리였는지 궁금하네요.
책, 기다렸는데 적폐운운하는 문구때문에 사고싶은 맘이 없어졌습니다.
광고문구때문에 책사기가 싫어질 줄이야.
적폐세력이라 죄송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정말 역작입니다. (이 나라의) 외식과 한식에도 언젠가 품격이 깃들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
오늘 아침 책 주문했습니다.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식, 특히 외식분야의 한식은 적폐라는 단어보단 총체적 난국이란 단어가 더 와닿는것 같습니다.
단순히 맛의 문제가 아니라 업자, 소비자, 재료, 매장운영, 부동산, 정부정책 등등…..1부터 10까지 모두 뒤엉켜있어 정말 한두가지로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외식의 품격을 읽고 한국에서의 외식 현실이 참담해졌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번 책도 기대되는 군요.
유럽에 거주중이라 종이책을 구입하기 어렵지만 전자책이 어서 나오길 기대하겠습니다.
그동안 눈팅만 할때도 느낀점인데, 제가 평소에 갖고 있던 음식에 관한 특히 한식에 관한 생각들이 작가님의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느끼며 안면일식 없는 작가님 이시지만 어느 순간부터 무한한 신뢰와 동질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고민 없이 책을 구입했고 정말 작가님의 모든 것을 쏟아 넣으신 이런 책을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한식이 맛이없다는 얘길 하는게 사실 쉬운일이 아닌데 대단하십니다. 인터넷에도 한식욕만 했다하면 달리는 악플을 생각해보면 출판은 도저히 꿈꾸기도 어려운 일인데 말입니다. 90년대 스시가 미국을 강타 했을땐 국력이 강한 나라라서 그렇다며 스스로 변명거리를 찾아내던 한국인들은 이제 동남아의 음식들의 세계적인 인기를 보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합니다. 한식은 맛이 없습니다. 특히나 참기름에 관한 내용과 전에 대한 통렬한 질타는 가슴깊히 공감가는 내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