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노 사이드-이상에 영향을 미치는 현실

주문을 받으면 주인이 바로 뒤의 앉은뱅이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낸다. 일단 반죽과 양배추, 숙주나물이 등장한다. 티 하나 없이 반질반질 윤이 나고 오코노미야키를 집중적으로 익히는 부분만 검은색인 번철에 반죽을 한 국자씩 올려 원형으로 펴바른다. 그 위에 양배추와 숙주나물, 그리고 삼겹살이 등장한다. 새로운 재료가 등장할 때마다 원하지 않아도 볼 수 밖에 없는 냉장고는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다. 비단 냉장고 뿐만이 아니다. 번철이 그렇듯 가게 전체가 깔끔하고 깨끗하다. 주인이 일본인임을 미리 의식하지 않더라도, 한국에서 흔히 접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반죽이 바닥판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익으면 뒤집개로 양배추와 숙주, 삼겹살 위에 반죽 약간을 뿌린 뒤 뒤집는다. 바닥판은 잠시 뚜껑 역할을 하며 재료를 익힌다. 그 사이 면과 나머지 선택 재료가 등장한다. 면은 뒤에서 한 번 삶은 뒤 불판 위에 올라가고, 오징어, 새우 등의 속재료는 가볍게 소금을 쳐 익힌다. 적당한 시점에서 바닥 반죽이 뚜껑으로 뒤집혀 있는 그 상태에서, 주인이 뒤집개로 오코노미야키를 누른다. 채소에서 빠져나온 물기가 번철의 뜨거운 열에 바로 끓어 오르며 날아가고, 오코노미야키는 가운데가 살짝 솟아오른 채로 절반 정도 구축이 완성된다.

이때 계란이 번철 위에 오르고, 바로 흰자와 노른자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 채 윗뚜껑으로 탈바꿈한다. 면-나는 우동을 선택했다-과 속재료가 채소와 삼겹살 위에 오르고, 그 위에 계란의 뚜껑이 덮힌다. 달착지근한 소스를 바르고, 조금 익힌 뒤 딱 절반씩 갈라 단면이 보이는 채로 먹는 이 바로 앞의 불판 가장자리에 정렬해 놓아준다. 그럼 각자 자신의 뒤집개로 원하는 만큼 잘라 접시에 올려 먹는다. 약 30분이 걸리는 조리 과정이다.

기억으로만 재구성했는데, 정확하게 맞는지 모르겠다. 이 리뷰는 아마도 블로그 12년 역사, 또는 음식글을 *전문*적으로 쓰기 시작한지 7, 8년 만에 사진을 포함시키지 않는다. 무엇보다 리뷰 대상의 원칙이 사진 촬영 금지이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영수증 사진이라도 올릴까 생각했지만, 차라리 이 편이 낫다. 글은 사진 없이 충분히 홀로 설 수 있다. 적어도 나의 글은 그렇다.

다시 오코노미야키로 돌아가자. 세 번째 시도만에 먹을 수 있었다. 영업시간이나 휴일 정보도 인터넷에서 찾기가 어려웠고, 워낙 들은 이야기가 많은지라 전화를 걸어볼 생각도 굳이 하지 않았다. 먹을 생각으로 나갔다가 안 열었으면 그냥 집에 돌아갔다. 세 번째인 어느 수요일 저녁엔 열려 있었다. 나 말고 손님 한 명이 더 있었고, 잘못하면 쫓겨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주문으로 감을 잡아 내 주문도 마쳤다.

안 그런 음식이 어디 있겠느냐만, 특히 노사이드처럼 주인이 엄격한 규칙을 세워 놓은 가게의 평가는 정말 단적으로 압축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을만 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좀 갈등하며 일어섰다. 일단 완성도는 좋다. 어차피 주인이 자기 페이스대로 요리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곳이고, 실제로 그렇게 움직인다. 물론 움직임 자체는 훌륭하다. 열 석 남짓인 번철 주위의 자리가 다 차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손님이 두세 명일 경우 완성도를 고민할 필요는 전혀 없어보인다. 위 아래 뚜껑은 재료가 다르지만 적당한 부드러움을 갖추며 익었고, 삼겹살과 오징어 등을 비롯한 단백질 각자의 조리 상태도 괜찮다. 뒤집개로 꾹꾹 눌러 물기를 뺀 채소도 미약한 아삭함이 질감의 단조로움을 막는다.

그런데 실제 맛을 들여다 보면 두 가지가 걸린다. 첫째, 각 재료의 맛없음이다. ‘맛이 나쁨’이 아니고 ‘무미’말이다. 한국의 일상적인 재료에서 느낄 수 있는 닝닝함, 표정 없음, 희미함 뭐 그런 것들이다. 양배추와 숙주가 그렇다. 노 사이드의 오코노미야키는 히로시마식이고, 마요네즈를 쓰지 않는다고 들었다(요청하면 불상사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실제로 계산대 근처에는 ‘양배추의 단맛을 즐기는데 방해가 되므로 마요네즈를 쓰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양배추는 실제로 그렇게 즐길 수 있을 만큼 단맛이 강하지 않다. 숙주도 그렇고, 여느 채소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재료의 기본적인 결함-이라고 말하기에도 한국에선 너무나 일상적인-이 완성도에 말하자면 결례를 범한다.

기타 단백질 재료도 마찬가지다. 소금간을 가볍게 하는 정도로는 맛을 끌어낼 수 있을 만큼 좋다고 볼 수 없는 재료들이고, 이들로 이루어진 속은 어우러졌다기 보다 각각 따로 노는 재료의 집합 수준에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윗뚜껑인 계란에 바른 소스가 전체의 균형을 잡기에는 조금 역부족이다. 왜냐하면 음식을 구축한 대로, 즉 아래와 윗뚜껑 사이에 채소와 단백질 재료를 균형이 맞을 정도로 싸서 먹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완성된 채 불판 위에 단면을 아름답게 드러낼 때까지는 희망적이지만, 먹는 이가 잘라 자기 접시로 옮기는 짧은 순간에도 구축의 균형은 깨지기 쉽다.

게다가 불판 위에 계속 올려 놓고 먹어야 하는 설정도 먹는 이를 힘겹게 한다. 일단 재료가 조금씩이나마 계속해서 익는다. 음식은 기본적으로 완성된 뒤 불을 잠시 떠나야 온도가 조금 내려가면서 전체가 어우러진다. 온도는 내려가지 않고, 얇은 밀가루와 계란 부침을 비롯해 과조리에 대체로 민감한 해물류가 계속해서 열을 받아 조리 상태가 변한다. 게다가 이마 쯤에 열을 계속 안으면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오코노미야키가 원래 이런 음식이라면 좋다. 불판에 올려 놓은 채로 재료도 계속 익고 얼굴도 엄청난 정도는 아니지만 달아 오른다. 그렇다면 음식 외의 요소가 때로 완충작용을 해 줄 필요가 있는데, 이곳에선 무엇보다 그게 가장 어렵다. 3인 이상의 손님은 받지 않고 2인이더라도 오코노미야키와 맥주의 조합으로 흔히 생각하기 쉬운 정도의 떠들석함은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아니면 나처럼 혼자 먹는 경우엔 절반 정도 먹을 무렵 숙제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1인 1주문에 20,000원 가량이 들고, 대신 혼자 먹기에 양이 조금 많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갈등했다. 1. 앉은 자리에서 그냥 다 먹고 나올 것인가? 2. 식었을 때의 맛이 궁금한데 싸가지고 올 것인가? 3. 그도 아니면 메시지를 던진다는 기분으로 반쪽은 그냥 그대로 두고 나올 것인가? 이도저도 귀찮아서 1번을 택했지만 다 먹고 일어나면서 조금 힘들었다.

기분이 나빴느냐고? 그렇지 않다. 가게의 전체적인 청결함이나 주인의 움직임 등을 보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렇게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수많은 경험담을 듣지 않아도 일정 수준 가능할 정도다. 현재 한국 사람 다수의 기본 매너가 어떤 수준인지 조금이라도 외부인의 눈으로 본다면 그렇게 욕을 먹는 이유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은 주인의 잘못이 아니라고 믿는다. 실제로 내가 먹었던 날에도 나보다 늦게 들어온 1인 손님이 웃옷을 벗어 빈 옆자리에 놓자 주인이 바로 옷걸이에 걸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토록 엄격한 분위기가 이미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기란 참으로 어렵다. 나는 먹는 행위가 자연스러워야 즐겁다고 믿는다. 맛있으면 맛있다고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뭐 혼자라면 속으로라도 기뻐해야 음식 먹는 보람이 있다. 소문이 날 정도로 엄격한 분위기는 설사 모두가 사실이 아닐 수 있고 모두가 주인의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먹는 이에게 일종의 족쇄-정도는 다를지언정-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드레스 코드를 지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다. 그런 종류의 규칙은 오히려 예상이 가능하고 자발적으로 지킬 수도 있다.

거기에 또한 주인의 책임이라고 보기 어려운 재료의 맛없음, 또는 그저 그럼으로 영향 받는 음식의 맛이 일종의 캐스팅 보트로 작용한다. 이상을 이해하고 100% 존중하고 싶고 사실 마음 속으로는 그러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러기가 조금 힘들다. 목적이 있어 찾아갔을 때는 최대한 가게의 의도를 따르고 헤아려 가며 먹지만, 가게 문을 나선 다음에 재방문을 선뜻 생각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사실 좀 고민했다. 이곳의 리뷰를 원하는 분들이 구체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나는 적어도 한 번은 더 먹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더 볼 것이 없었다. 완성도는 이보다 더 좋기 어려울 텐데 재료나 접근은 바뀌지 않는다. 그럼 똑같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건 괜찮지만 그 분위기를 짧은 시간 내에 또 접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그렇다. 나는 주인의 이상을 높이 사고 또 존중한다. 하지만 전부가 그의 책임이 아니더라도 현실은 현실이다. 아니, 주인의 이상이 오히려 현실을 인식하는데 필요 이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서 오히려 그게 다소 아쉽다.

3 Responses

  1. jeeseob says: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 사이에 음식이 놓여있는데 세 요소(?)의 거리는 가깝지만 어색하다고 해야할까요? 자리를 그쪽으로 옮기기전에 몇번 갔는데 디긋자 바의 코너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가다 눈마주치고 시비 붙고 싸움이 되어 치고 받고 하니 사장이 당황하며 일본말과 한국말을 섞어서 말리는데 전혀 먹히지 않더라고요. 말씀하신대로 옷걸이를 사용하는 것을 기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하루하루의 재앙(?)에 대항하여 자기의 것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딱딱해지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네요. 한국 사람의 입장에서는 편한게 좋으니 그곳의 공기가 부담스럽고 불편하니 예민해 질 수 있는 것 같고요.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어쨌거나 글 고맙습니다.

    • bluexmas says:

      그런 일도 있군요; 저도 가게의 입장 자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음식이 맛있기 어려운 외부-현실적 이유가 아쉽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 zikron1@naver.com says:

    좋은 글 잘 봣습니다.
    노 사이드의 가장 큰 문제는 말씀하신바와 같이 저러한 불편함을 감수하고 먹을 만큼 맛이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맛이 없다는거죠…… 히로시마야키라고 자랑스럽게 말씀은 하시는데 히로시마야키가 아니라 서교동야키 정도의 맛 이상이 나오질 않으니 불평불만이 많은게 아닐까요?
    거기다 혼자가면 대부분 쫓겨나는게 일상이니 좋은 얘기가 퍼질래야 퍼질수가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