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질환: 덜 구운 빵
삼성-신라호텔을 딱히 더 비판적으로 바라볼 의도는 전혀 없다. 나 아니어도 자진해서 열렬하게 행동에 옮길 이들이 많고, 그런 현실-일종의 ‘공적’-에서 10만큼의 비판을 100으로 부풀려 받아 들이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한 술 더 떠 의도한 적 없는 ‘사이다’ 대접까지 받는데 즐겁지 않다.
하지만 종종 찾을때 가격을 포함한 맥락 때문에 단점이 더 두드러져 보일 확률은 아주 높다. 이를테면 호기심에 열 가지 정도 사보았던 페이스트리 부티크의 빵은 개당 3,000원대다. 단일 품목으로는 비싼 편인데 각각의 맛을 논하기가 어렵다. 일단 제대로 구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덜 익었다.
눈으로도 일단 의심이 가지만, 맛을 보면 확실해진다. 단팥빵은 손으로 눌러 구멍을 낸 가운데 주변 반죽이 거의 전혀 익지 않아 축축하다. 기억이 잘 안 나는 동유럽의 빵 이름을 붙였지만 구운 ‘고로케’도 축축하고 덜 익은 냄새를 살짝 풍긴다. 부풀어 오르기는커녕 공기의 혜택을 전혀 입지 못해 되려 쇼트케이크에 가까운 ‘스콘’도 확실히 덜 익었는데, 이 전체적인 상태가 구운 온도를 추측 가능케 한다. 숫자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마이야르 반응이 적극적으로 일어날 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반적인 제과제빵의 최저 온도(180°C)보다 낮지 않았을까. 혹시 몰라서 200°C로 다시 구워 보았지만 먹을 만한 상태로 회복되지는 않았다. 그나마 카스테라 한 가지만이 비교적 잘 익어 먹을 수 있었다. 품목의 선택도 전혀 개성도 특색도 없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는 거기까지 살펴볼 필요도 없다. 덜 구웠으니까.
물론 덜 구운 빵은 비단 신라호텔 페이스트리 부티크만의 문제는 아니다. 글의 제목에서 ‘만성 질환’이라 밝혔듯 거의 어디에서나 맛볼 수 있다. 그나마 소위 식사빵 유행이 번지면서 판국이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일본의 영향을 받았을 단과자류는 적절히 구운 걸 먹기 어렵다. 팥처럼 단 재료든 소시지처럼 짠 재료든, 밀가루 반죽이 핵심 아닌 매개체(vehicle) 역할을 하는 빵이라면 백이면 백 재료와 닿는 부분은 덜 익어 있다.
비단 굽기만이 문제라면 괜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덜 굽기는 이전까지 과정의 문제가 축적된 상태에서 ‘결정타’를 날리는 역할을 한다. 굽기를 논하기 전에 발효부터 적절하게 되지 않았고, 이를 덜 구워 악화시킨다는 말이다.
덜 구운 빵과 직결된 문제는 맛 이전에 소화라 본다. 흔히 밀가루 음식을 놓고 ‘소화가 안 된다’는 말을 하는데, 한국에 밀가루를 소화시킬 수 있는 상태로 조리하는 음식이 과연 얼마나 존재할까. 밀의 물성을 감안한다면 일단 공기를 채워 넣지 않은 음식은 높은 확률로 밀도 조정에 일단 실패한다. 수제비 같은 음식 말이다. 심지어 숙성시킨 반죽을 늘려 뽑다는 국수도 설 익은 밀가루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걸 먹어본 적 있다. 국산으로 지방의 소규모 업자 생산품이라며 나름의 인지도를 가진 제품이었다. 면의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우툴두툴해, 수분의 비율이든 숙성이든 생산 과정의 하자를 그대로 반영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빵은, 이런 물건이 일상이듯 끝까지 익히지 않는다. 과연 밀가루 음식 자체의 문제일까, 덜 익힌 밀가루 음식 일부의 문제일까. 한국 식문화가 쌀과 밥 위주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편파적인 건 아닐까.
다시 삼성-신라호텔로 돌아와 보자. 얼마 만큼의 기대를 품어야 할지 설정하기가 쉽지 않다. 직관적으로라면 ‘아니 한국 최고의 호텔이 덜 구운 빵을 팔다니 말이 되나’라고 반응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대세고 만성 질환이다. 따라서 설사 한국 최고 호텔의 빵집이라도 철저히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것이라 기대하기가 사실은 어렵다. 안타깝게도 내가 경험한 신라 호텔의 다른 음식도 뒷받침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큰 기대를 품지는 않지만, 한 가지는 못내 궁금하다. 비싼 빵이다. 비단 재료 때문에 비싸지는 않을 것이다. 호텔이라는 맥락이 기본적으로 먹고 들어가며, 요리사는 물론 관리자들도 여느 곳에 비해 우수한 인재를 채용하거나 그에 맞게 보수를 줄 수 있다. 그런 이들 가운데 이런 빵의 조리 상태에 대해 의심을 품은 이가 과연 전혀 없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런 인재들을 그렇지 않은 이들과 구분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차라리 재료는 정직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과 능력은 정직한 걸까?
혹시 떡 먹던 민족이라 떡의 찐 느낌과 시각적 인상에 인이 박혀서 그런 건 아닐까요?
굽는 사람도, 덜 익은 빵을 먹는 사람도, 다같이 인식을 못 하고 만성이 되도록 되풀이하고 있다는 건
그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유럽 처음 와서 거뭇거뭇 탄 테두리와 바닥의 피짜에 놀라고,
토스트를 한국인들보다 훨씬 바싹 구워 먹는 것 보고 놀라고.
제과제빵 경연대회에서도 심사위원들이 늘 축축한 바닥(soggy bottom)인지 아닌지부터 체크하는 것 보고
이 사람들한테 덜 익은 밀가루 바닥이란 극악무도한 것이구나 깨달았죠.
(마침 타트 블라인드 베이킹 하고 있는 중.)
고온에 조리된 탄수화물도 몸에 썩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맛이라도 있죠,
덜 익은 탄수화물은… 어우…
공감합니다.
닭이 먼저 인지 달걀이 먼저 인지 모르겠지만, 덜 구운 빵에 익숙한 소비자는 덜 익은 빵만 찾습니다.
저도 오븐에서 크로와상을 뺄때마다 2분 더 굽고 싶지만~ 장사하려면 지금 빼야지 같은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번은 탄빵을 판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덜 구우면 손님이 좋아 하니까.. 조금 더 덜
굽게 되고, 덜 구운 빵에 익숙해진 손님들이 다시 덜 구운 빵을 찾는 악순환에 이미 들어선 것 같습니다.
여기에 탄것을 먹으면 암에 걸린다는 속설이 한몫을 거들기도 하죠.
이런 기사도 있는데요. 덜 익은 빵을 선호하는 것이 한국만의 특징인가요?
“그런데 요즘 프랑스에서는 이보다 훨씬 짧은 17분 정도 구운 바게트가 대부분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이 지난 8월 보도했다. 먹음직스러운 황금빛 껍질이 아닌, 허옇게 덜 익은 바게트가 파리 대부분의 빵집에서 팔리고 있다는 말이다.
덜 구운 바게트를 손님이 원하기 때문이다. 바게트 먹다가 입천장이 벗겨졌다느니, 턱 빠질 뻔했다는 한국인 관광객이 많다. 그만큼 바게트는 빵 껍질이 딱딱하고 두껍다. 한국 사람들만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프랑스 사람들도 두꺼운 바게트 껍질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한다. 갈수록 부드러운 식감을 선호하는 경향은 프랑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0/16/2013101667008.html
이 경우는 bluexmas님이 말씀하시는 ‘설익은’ 빵과는 좀 다른 듯한데요.
부드러운 식감을 선호해 바게뜨를 예전보다 조금 덜 구워 판다는 얘기지
밀가루 날내 풀풀 풍기며 바닥이 저렇게 찐득하고 축축할 정도로 설익힌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게다가 소비자가 토스터나 오븐 등으로 다시 구워 먹을 것을 염두에 두어 그렇게 한다는 추가 설명도 있네요.
bluexmas님이 사 오신 빵들은 소비자가 집에서 다시 굽기 좀 애매한 단빵들 아닌가요.
한국에는 오븐 없는 집 아직 많아요. 토스트 기계에는 두꺼워서 안 들어갈 테고요.
저 대신 정확하게 구분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