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빵, 호두과자와 음식의 시각성
모두가 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 ‘안 들어 있다’가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될 것은 없다. 모두가 일종의 유희로 받아 들인다. 오히려 붕어가 들어 있다면 더 이상할 것이다. 물론, 현대 요리의 세계에서 완벽하게 불가능한 ‘미션’은 아니다. 붕어를 주재료로, 붕어처럼 생긴 빵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맛도 있을 것이다.
호두과자는 어떤가. 레스토랑을 취재 다니며 거의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붕어빵 수준의 시각성 및 형태 유희를 놓고 고민하던 차 생각이 났다. 장항선이 충남 예산으로 향하던 거의 유일한 교통 수단이던 시절, 그 기차 안에서 늘 보았던 바로 그 호두과자다. 흰 앙금을 먹겠다고 일부러 전화까지 찾아 걸어 받았다. 이걸 놓고 생각했다. 호두과자는 왜 호두과자인가. 모양 때문이다. 호두처럼 생긴 틀에 반죽을 부어 찍어 낸다. 하지만 붕어빵과는 조금 다르다. 호두 과자에는 정말 호두가 들어 있기는 하다. 약 1/4개의 호두 조각이 반죽과 소 사이에 박혀 있다. 이 호두가 과자의 정체성을 담보해주는 제 일 요소인가? 고민해 볼, 음식의 맛과 시각성 사이의 관계다.
몇 가지 시나리오를 가정해볼 수 있다. 호두과자가 호두과자일 수 있는 일련의 조건이다. 호두 과자의 소는 팥으로 만든다. 그럼 팥 과자로 불러야 맞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궁금하다. 호두로는 팥처럼 소를 만들 수 없을까? 방법은 다르겠지만 가능하다. 갈아서 설탕, 꿀 등 당류에 개어 페이스트 형태로 만들면 된다. 이렇게 호두로 만든 소를 채우되, 의도적으로 형태를 지운다고 가정해보자. 현존하는 호두과자보다 호두 맛이 더 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호두과자라고 인식할 것인가?
다른 방법도 있다. 호두를 곱게 갈아 밀가루에 섞어 빵이든 과자든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쓴맛이 나는 껍질은 미리 벗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 번 구워 맛을 끌어낸 다음 간다. 호두의 맛과 향을 진하게 풍길 것이다. 물론 이런 요리법은 이미 존재한다. 이탈리아에 뿌리를 둔 아몬드 케이크다. 아몬드와 밀가루를 함께 갈아 만든 반죽을 굽는다. 물론 아몬드처럼 생기지 않았지만, 공식 명칭은 ‘아몬드 케이크’다. 아몬드의 맛과 향을 풍기기 때문이다. 원래의 레시피는 얇게 저민 아몬드를 마치 비늘처럼 케이크 위에 흩뿌려 굽는다. 하지만 이마저도 얼마든지 지울 수 있다. 반죽에 쓸 것과 함께 갈아, 버터와 설탕을 섞어 스트루셀(streusel; 소보루)로 만든다. 이로서 시각적으로는 아몬드의 자취를 완전히 지울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아몬드 케이크다. 입과 코로 얼마든지 아몬드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음식의 본질 감상을 위한 주요 감각기관이 아몬드를 인식해 정체성을 보증한다.
음식의 시각성에는 다양한 결이 존재한다. 단순한 미추 여부를 따지는 것부터 시작해, 개념 표현 수단까지 여러 개별적 상태가 존재한다. 양 극점을 제외하면, 각 상태 전부를 아우르는 규칙이 하나 있다. 무엇보다 맛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셰프는 일단 원하는 맛의 개념을 잡고, 그것을 중심 삼아 시각을 포함한 총체적 경험을 계획하고 또 미세조정한다. 그렇다면 양 극점이란 어떤 상태인가. 한쪽에는 붕어빵이 있다. 유희를 위한 의도적 일탈이고, 형태의 차용이다. 반대쪽은 단백질까지 포함한 재료의 물성을 조작할 수 있는 현대 요리다. 더 극적인 경험을 좇아 높은 수준의 조작이 가능하지만, 이 경우에도 최소한의 원칙을 따른다. 음식으로 디오라마를 만들기를 주목적으로 삼지는 않고, 설사 그런 경우라도 붕어빵의 경우처럼 유희를 위한 의도적 일탈, 또는 위악임을 스스로가 알고 있다.
이러한 점을 모르거나 혼동하는 음식을 꽤 자주 만난다. 파인 다이닝의 맥락 속에서 맛과 시각화(또는 프리젠테이션)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는 데다가, 디오라마 같은 공예적 조작이야 말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돌하르방 케이크 같은 디저트가 등장한다. 그렇다, 확실히 이러한 현상이, 조작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디저트의 영역에서 더 많이 벌어진다. 심지어 이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의, 가장 기본적인 콘셉트와 시각화의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있다. 이번달 올리브 매거진 레스토랑 리뷰 대상인 스와니예의 디저트가 그랬다. ‘안개’라는 이름의 디저트는 핵심이 복숭아 소르베다. 그 위에 안개를 형상화한 솜사탕을 얹는다. 시각성만 놓고 보아도 약하고, 맛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심지어 복숭아 소르베만으로도 훌륭하다. 콘셉트를 나중에 부여하려는 욕심이, 좋은 디저트에게 사족을 달았다는 결론 밖에 낼 수 없었다.
생각해볼 문제다. 안개를 맛으로 표현할 수는 없는 걸까? 안개에는 습기와 흐릿함이 따라온다. 과연 이 두 특성을 맛으로, 그것도 각자가 추구하는 요리의 장르 내에서 추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차라리 드라이 아이스의 승화 연기 같은 걸 차용하는 편이 오히려 더 나은 선택은 아닐까? 제주도는 어떤가. 돌하르방은 형태의 이상향이지, 음식이 가장 먼저 추구해야 할 맛의 이상향은 아니다. 스와니예의 또 다른 디저트인 무스도 같은 개념적 오류의 산물이었다. 제주도 현무암층을 시각적으로 모사하는데 그쳤기 때문. 제주도가 각 셰프에게 어떤 인상을 안기든, 그 구현은 일차적으로 맛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추상화 및 재 구체화의 단계를 거치는 동시에 식재료의 물성을 감안해야 하므로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파인 다이닝 수준에서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인데, 흙이나 바위, 이끼의 형태나 색을 닮았다는 이유로 초콜릿이나 녹차를 차용하는 수준에서 그친다면 한편으로 자격 미달이다.
덧붙이자면, 스와니예의 일반 음식 또한 이러한 개념적 오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원하는 개념을 맛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기본적인 재료의 선택이나 시각성에 기댄다. 단적으로 10월에 먹은 시즌 8 ‘야생(wild)’은 심지어 진짜 야생의 식재료도 아닌 달팽이, 더덕, 개구리 등을 지극히 평범한 방식으로 조리하는 수준에서 야생을 구현한다고 믿는, 아주 나이브한 시각을 드러냈다. 뚜렷하지 않은 개념 설계의 단점을 최대한 완벽한 조리로 가리니, 맛만 놓고 본다면 만족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파인 다이닝을 향한 기대는 그보다 높아야 하지 않을까. 개념의 과제를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측면에서, 역시 정식당이 나쁜 선례를 남겼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족: 추억 외에는 큰 가치를 두지 않지만, 오랜만에 주문한 호두과자의 전도 팜플렛-그것도 망자의 사진을 적극 활용한-은 굉장히 ‘creepy’했다. 이런 거 넣을 의욕으로 전화 응대-직원 교육 같은 거나 개선하는 게 낫다.
한편, 돌하르방이 식욕을 부르는 비주얼은 아닌 것 같은데..
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