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의 이해(11)-술의 자리
NOTE: 이제는 과거가 된 <젠틀맨>에 연재했던 ‘미식의 이해’ 원고 가운데 하나다. 사실은 올린 줄 알고 있었다. 어차피 같은 주제인지라 여태껏 올린 글과 당연히 겹치는 구석이 있지만,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올려 놓는다. 에둘러 말하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고, 또한 그렇게까지 말해서 누군가를 납득시키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내가 원하는 말투로 해주지 않는 것이 불만이라면, 다른 곳에 가서 찾으면 된다. 세상은 넓고 좋은 이야기 해줄 사람도 많다. 계몽 같은데 관심 없다.
그리하여 고담은 절멸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배트맨의 희생으로? 아니다, 그는 살아있었다. 미리 도시를 떠난 알프레드의 시선이 닿는 곳에, 그가 앉아 있었다. 그것도 캣우먼과 함께. 알프레드가 바라던 그대로였다. 그래서 마시려던 잔을 살짝 들어 반가운 마음을 표한다. 카드를 지갑에 막 넣으려던 찰나였으니, 분명히 식후주(disgestif)였을 것이다. 신사의 한 끼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토요일 저녁, 주방이 활짝 열린 레스토랑에 찾아간 적이 있다. 거의 만석이었다. 하지만 셰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이유는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4인석을 채운 커플, 파스타 접시에 물잔이 전부였다. 심지어 맥주조차 시킨 테이블이 없었다. 풍요속의 빈곤, 더 나아가 전멸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레스토랑의 안위마저 염려스러웠다.
소비량 세계 수위권에 빛나는 대한민국의 술 사랑은 파인 다이닝의 테이블 위에서 무참히 쪼그라든다. 이유는 꼽자면 끝이 없지만, 역시 희석식 소주가 대표하는 ‘질보다 양’ 그리고 ‘먹고 죽자’의 음주문화 탓이다. 취하기 위해 마시는데 두주불사 낙원의 입장료는 한 병에 고작 3,000원이다. 라면이 천원을 넘긴 요즘이니 터무니없는 가격이다. 싸게 취할 수 있는데 굳이 비싼 술을 마셔야 할 이유가 없다. 세금을 포함, 복잡한 가격책정 정책 또한 도와주지 않는다. 현지보다 두세 배 비싼 소비자가가 레스토랑의 테이블에서 또 두 배는 더 뛴다. 선뜻 지갑을 열지 못하는 사정도 이해가 갈 정도다. 이렇게 악재가 겹쳐 파인 다이닝은 침몰한다. 술이 이익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요리로 내는 이익은 현상유지용이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손님이 마셔줘야 한다. 좋은 레스토랑도 오래 버티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술이 없이 경험은 완성되지 않는다. 음식이 좋아봐야 절반의 성공일 뿐이다. 뉴요커 지의 필자 아담 고프닉은 음식 문화 비평서 <식탁의 기쁨(The Table Comes First)>에서 ‘물과 먹는 저녁은 죄수를 위한 것이다. 현대인의 식사는 여는 술과 닫는 커피, 그 사이의 술잔 위에서 벌어지는 연극이다’라고 말했다. 술을 포함한 음료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이는 비단 파인 다이닝의 술이라고 할 수 있는 와인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손님의 경험을 극대화시켜주는 형식의 코스에는 반드시 단계별로 걸맞는 술이 따라붙는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알프레드가 마신 식후주도 그 가운데 하나다.
‘술=알코올’이니 여흥, 즉 분위기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마셔야 하는 이유는 그 바깥에도 존재한다. 지극히 기능적인 역할 또한 떠맡고, 따라서 어울리는 종류가 따로 있다. 코스를 여는 식전주라면 아뮤즈부시나 전채와 더불어 입맛을 돋워준다. 따라서 달지 않고 오히려 드라이해야 한다. 그래서 샴페인, 베르무트나 진 또는 그 바탕의 칵테일이 정답이다. 반면 식후주는 디저트와 커피 뒤에 나오고 소화를 돕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digestif(프랑스어로 소화제)’라 부르며, 도수가 높고 약초 등으로 향을 더한 증류주 계통을 스트레이트로 마신다. 브랜디나 오드비, 우조나 위스키에서 칵테일의 바탕으로 많이 쓰는 그랑 마니에르나 샤르트루즈, 한때 메탈리카-좀 더 정확하게는 제임스 헷필드?-를 재활의 길로 몰아넣었다는 예거마이스터 등, 세상은 넓고 마실 술은 많아서 고민일 지경이다.
그리고 그 사이의 술로 와인과 맥주가 있다. 악명 높은 적반하장-이코노미스트의 기사에 대한 맥주제조사의 항의를 기억하시는지?-의 국산맥주 때문에 ‘맥주가 와인과 동급? 제정신인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둘은 우열을 가릴 필요가 없는, 다른 술이다. 샌프란시스코의 <크와(COI, 미슐랭 별 두 개)>의 테이스팅 코스에서는 두 술은 물론 사케까지 등장했던 기억이 난다. 재료와 도수, 맛이 천차만별이지만 모두 경험의 반쪽으로서 즐거움을 배가시켜주었다. 그 반쪽의 첫 번째 책임은 균형이다. 반사적으로 ‘느끼하다’라는 반응을 보일 정도로, 서양 음식은 지방이 바탕을 잡는다. 음식 자체의 소금간과 산이 이를 덜어내지만 역부족일 수도 있다. 이를 술이 돕는다. 산의 신맛과 타닌의 쓴맛, 당의 단맛이 가세한다. 다소 길어질 수 있는 지방의 꼬리를 자르고 입을 씻어주니 한입, 또 다음 입이 새롭다. 햄버거에 콜라, 중국음식의 차 등도 모두 같은 원리다. 매운맛이라면 단맛이 가셔주고 알코올이 지용성인 캡사이신을 녹여준다.
일단 균형을 맞췄다면 손을 잡고 더 나은 하나의 존재로 거듭날 차례다. 이는 주로 신맛, 쓴맛, 단맛의 공통적인 특징 너머의 뉘앙스, 또는 디테일에 기대는 과정이다. 초콜릿의 예를 들어보자. 원두를 발효시켰다가 구워, 맛과 향이 굉장히 복잡하다. 쓰고 신맛은 물론 과일, 견과류, 담배 등의 향이 한데 얽혀있다. 따라서 짝짓기 또한 그 향의 가닥을 이어 동아줄을 엮는 과정이다. 사촌격인 커피는 기본이다. 산지부터 가공방법까지, 성질이 비슷해 죽이 잘 맞는다. 초콜릿 디저트에는 커피가루 한 숟가락을 반드시 더할 정도다. 술과도 다양하게 짝지을 수 있다. 셰리나 포트 등의 대표적인 주정강화 와인부터 카베르네 소비뇽, 샴페인 등도 가능하다. 이름이 말해주듯 초콜릿 스타우트도 잘 어울린다. 물론 붕어빵처럼, 초콜릿 스타우트에 초콜릿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맥아를 초콜릿색이 나도록 구워 만들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와인 소비자가격이 생산지보다 2~3배 비싸고 희석소주와 밍숭맥주가 싼 가격에 자리잡으니, 비싼 고깃집이나 해물집에 가도 소맥판이죠.. 아쉬운대로 조금씩 고급맥주 반주 문화라도 더 퍼지면 좋겠습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2015년 새해 복과 돈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