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당의 소금, 후추, 파
어째 사진이 비슷하게 보인다면 맞다. 어제 글의 것과 같다. 일부러 재활용한다. 저 국 한 그릇을 놓고 할 얘기가 남았다. 글이 길어질 것이라 생각해 아예 나누었다. 누군가 자세히 보았는지 모르겠는데, 후추를 거의 쏟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맛이랄게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상태라 맛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저런 후추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어울리기는 한다. 고깃국물에 소량의 후추를 뿌려주면 다들 좋아하는 “풍미™”가 좋아진다. 왜 그럴까. 국물을 오래 끓여 신선한 후각적 요소가 안 남은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사실 후추 또한 더 생기 있는 걸 써야 한다. 이제 모두가 아는 것처럼 후추는 열매이고 알갱이다. 이를 으깨는 순간부터 특유의 향이 나오는데, 휘발성이 강하므로 금방 사라진다. 어느 회사 제품이든 이미 갈려 봉투에 담겼다면 사실 음식에 정말 의미 있는 역할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갈린 상태로 오래 묵은 향신료를 우스개로 ‘톱밥’이라 부른다. 다른 향신료는 모르겠지만 후추라면 이제 식탁 위에서 직접 갈아 쓸 수 있는 제품을 도입할 수 있지 않을까? 청진옥도 그렇고 하동관 같은 소위 ‘노포’의 음식값은 싼 편이 아니다. 거기에는 한국의 짧은 역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세월 음식을 냈다는 자부심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음식도 좀 더 잘 할 필요가 있고, 이렇게 자질구레한 것들을 다시 보는 데서 출발한다. 버터가 대중화되면 마가린으로 빵 만들기를 멈추고 그에 맞춰 레시피를 조정해야 하듯, 현대에 맞춰 전통을 조정할 필요를 자각한다면 출발점은 이런 곳이어야 한다.
후추니까 이 정도 수준이고, 사실 소금을 놓고는 더 큰 고민이 필요하다. 역시 가장 중요한 건 간 그 자체의 유무와 시기. 달리 말해, 내오기 전에 개별 음식에 간을 하느냐는 것. 하지 않는다면 일단 그것부터 문제다. 나는 항상 헛갈린다. 그 이유가 ‘손님에게 맞춘다’와 ‘거기까지 신경쓰기 귀찮다’의 사이 어딘가에 있기 때문이다. 둘 가운데 어느 쪽으로 치우쳐도 핑계인 건 마찬가지. 가장 큰 이유는 언제나 말하는 것처럼, 소금을 더한다고 음식에 바로 짠 맛이 돌지 않는다는 사실. 이전 단계에서, 특히 가열을 한다고 가정할때, ‘재료의 합+a’의 맛이 난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식탁에서 소금을 더해 간을 맞춰 내는 것과 다른 맛이다. 물론, 100도 넘도록 펄펄 끓는 채로 나오는 상황이라면 왠지 식탁에서 소금을 넣어도 맛은 제대로 날 것 같지만.
식탁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올려 놓는 소금 또한 후추와 비슷하게 관리해야 한다. 아니, 어쩌면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위생 문제가 걸리기 때문. 이미 자기 그릇에 담근 숟가락으로 소금을 떠 국의 간을 맞추는 경우를 보았는가? 나는 생생하게 목격했다. 물론 소금통에 숟가락이 딸려 있었다.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 간을 적절하게 해서 내더라도 습관적으로 소금을 더하는 경우가 분명히 있을 것이므로, 소금통 또한 새로운 방법으로 관리를 해야 한다. 이는 관찰해보면 소금의 입자와 관련이 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천일염을 더 바람직하다고 믿고 중간 입자 이상의 소금을 식탁에 올린다. 병에 담아서 뿌릴 수 있는 상태라면 더 위생적일 수 있는데,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다. 굳이 천일염을 쓰겠다면 갈아도 되고, 아예 고운 입자로 나온 것도 있다. 굳이 집착하지 않는다면 정제소금을 선택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간 크기 이상의 정육면체 결정 소금은 국물에 잘 녹지 않는다. 요즘은 후추처럼 소금 또한 일회용 갈이(grinder)에 담아 파는 제품이 나온다. 요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파.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굳이 대파를 써야 하는 걸까? 맛을 위해 쓰는지, 아니면 선택이 오직 그것 하나 뿐이라서 쓰는지 모르겠다. 전자라면 설득력이 너무 없다. 다시 한 번, 후추와 마찬가지로 파 또한 오래 끓여 신선함이 닳아 없어진 음식의 표정을 보충하기 위한 역할이다. 곧 나무가 되어 버릴 것처럼 굵은 파가 과연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걸까? 과유불급이라는 생각이다. 둘째, 왜 진이 나오는 녹색 윗둥까지 무차별적으로 썰어 내는가. 육개장 등에 통째로 넣어 그 맛을 즐기는 경우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파의 윗둥은 그 자체를 먹기엔 유쾌하지 않은 식재료라고 생각한다. 아까우면 국물 우리는데 쓰고 버리면 된다. 셋째, 굳이 저런 그릇에 담아 식탁에서 돌아가며 써야만 하는가(홍대 겐로쿠 우동의 파를 생각해보라. 끔찍하다). 그래도 청진옥은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아 두는 하동관에 비하면 양반이다. 관리나 위생 문제도 그렇지만, 저런 설정이 음식의 맛과 어떤 관계인지 고민해야 한다. 저런 파를 원하는 만큼 넣을 수 있는 것이, 과연 0인채로 식탁에 나오는 소금간과 더불어 ‘먹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맛’의 방증인가? 과연 그것이 정말 요리사가 매만진 설정에 의한 결과인가? 한식당의 요리사는 어떤 존재인가?
전통을 변해서는 안되는 상태라고 못박는 시점부터 퇴보는 시작된다. 적어도 음식에서는 그렇다. 많은 작은 것들이 전체의 인상을 좌우한다. 진정 보존해야할 가치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건드리지 않고 개선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마저 무시하면 전통은 전통이 아니다. 습관이다. 한식이 호소력을 잃고 있다면 그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 전통과 습관을 구분하지 못하고, 전자의 이름으로 후자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후추 같은 경우, 심지어 싸구려 고기뷔페에서도 페퍼밀을 쓰는데 저런 >노포<에서 기존에 써 오던 후춧가루를 그대로 쓴다는 건 그냥 태만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되더라고요.
그렇습니다. 저런 건 그나마 쉽게 바꿀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