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 디올 카페-훌륭한 공간, 궁여지책의 메뉴
취재 나간 김에 청담동의 디올 카페를 가보았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크리스티앙 ‘드’ 포르잠박(내가 한참 그를 좋아했던 시절엔 그냥 ‘크리스티앙 포르잠박’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이 설계했고 미국의 피터 마리노가 인테리어를 맡았다. 포르잠박은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 설계경기에도 참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첫 시도 후 20년 만에 한국땅에 진출한 것. 그 꼭대기층인 5층에 카페가 있고, 거기에서 피에르 에르메의 디저트를 낸다.
일단 카페 공간은 좋다. 오후 2-3시경에 있었는데, 빛이 딱 적당한 상태로 들어왔다. 이런 분위기의 인테리어는 정확하게 사용자에게 편안함을 주겠다는 의도는 아닐텐데, 빛이 그런 역할을 한달까. 심지어 아메리카노 한 잔 19,000원의 메뉴를 받아들고서도 가시지 않을 정도의 편안함이었다. ‘피에르 에르메=이스파한’ 이라는 생각에 이스파한 아이스크림과 에피메랄 케이크(각 22,000원),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 더블샷(각 19,000원)을 시켰다. 그리고 바로 옆의 바에서 디저트 조합하는 광경을 지켜 보았다.
일단 에피메랄 케이크. 파운드케이크에 패션프루트 가나슈를 입혔다. 말랑거리고 부드러운 가나슈의 질감과 신맛에 비해 파운드케이크는 단맛이 조금 떨어지는 한편 입자가 굵다. 그 둘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생각. 파운드케이크라는 건 일종의 ‘완전체’라고 생각하는 터라, 거기에 가나슈를 입히는 것이 부가가치를 입히는 방식으로써 적절해 보이지 않았다. 아이싱 정도라면 또 이야기가 다를텐데, 그럼 아마도 그만큼 ‘있어 보이지(substantial)’ 않을 것이다. 맛을 보아서는 별 의미가 없는데, 그렇다고 보기에도 별 의미 없어 보이는 걸 붙일 수는 없으니 가나슈가 된 것 같달까.
이스파한은 홍대 마카롱에서도 먹을 수 있는 맛의 조합이라 이제 친숙할 것이다. 리치의 단맛이 중심을 잡고 그 향과 장미향이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거기에 이 디저트에서는 라즈베리 소르베가 신맛을 더한다. 그런데 왜 하필 생크림일까. 그렇다, 가운데 높이 솟은 요소가 생크림이다. 크림 자체가 맛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나머지 요소의 단맛과 신맛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전체를 아우르라는 의도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너무 많고, 그와 더불어 질감이 다른 요소와 대비했을때 썩 유쾌하지 않다. 차가운 매끈한 소르베를 즐기는데 걸림돌이랄까. 굳이 생크림을 이다지도 많이 쓸 이유가 없다. 아예 빠져도 나머지 요소의 균형이 괜찮은 데다가, 정 아우르거나 균형을 잡아주고 싶다면 비슷하지만 더 나은 요소를 쓸 수도 있다. 신맛 없고 지방-단맛 위주의 아이스크림도 가능하고, 하다못해 훨씬 감촉이 매끈하고 좋은 마스카르포네 무스 같은 것도 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크림을 쓴다니, 그저 공간을 메우기 위한 filler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바에서 다른 아이스크림 디저트가 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거기에도 생크림이 중심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90년대 카페에서 유행하던 파르페도 아니고.
이것이 최선일까. 이곳은 고급스러운 경험을 위한 공간이다. 공간 자체도 그렇지만, 내오는 식기나 헝겊 내프킨 등 다른 요소도 훌륭하다. 접객도 나무랄데 없다. 이러한 경험을 위한 비용이 1인 최소 3-4만원이다. 그걸 감안하면 정작 음식 자체의 치밀함은 떨어진다. 왜 굳이 파운드케이크일까. 마카롱이야 이미 들어왔으니, 작은 케이크 즉 프티 가토류도 낼 수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케이크만 접시에 덜렁 담아낼 것이 아니라, 그 외의 플레이팅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파운드 케이크에 가니시를 곁들이는 플레이팅보다는 아예 플레이팅을 전제로 고안한, 앙트레 같은 디저트를 내는 것이 격에 맞을 것이다.
왜 그런 디저트를 먹을 수 없을까? 이스파한을 비롯, 다른 아이스크림 디저트도 정확하게 먹는 이를 고려한 플레이팅 디저트라고는 볼 수 없다. 매끈하고 녹아 내리는 아이스크림-소르베류를 다리 달린 와인잔(리델?)에 담아내는 건, 불편함을 감수할 정도로 정확하게 아름답지 않다. 달리 말해, 정말 아름답다면 불편함을 감수하겠지만 그만큼의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메뉴에서 패턴을 읽는다. 그다지 높지 않은 난이도의 요소를 미리 만들어 막판에 적절히 조합해 약간 그럴싸해 보이는(따라서 사진발도 좀 받는) 디저트를 내는, 궁여지책의 패턴이다.
대체 누가 주방을 지키는가? 나는 궁금하다. 이러한 메뉴는 원하는 수준의 고난이도 디저트를 꾸준히 낼 수 없을 거라는 판단의 산물이다. 집기, 그릇 등등은 어떻게든 원하는 걸 들여올 수 있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다는 판단의 산물이라는 말이다. 이미 마카롱이 진출한 상황에서 피에르 에르메가 낼 수 있는 최선의 카드가 아니라는 말이다. 메종 엠오에만 가도 이보다 더 나은 생각과 기술의 산물인 디저트를 반값에 먹을 수 있다. 누가 결정했는지 모르지만, 그/그녀도 이게 음식 자체만 놓고 보았을때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리라 본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우리의 현실은 분명히 나아지고 있다. 이것은 디올/피에르 에르메의 이름값과 그에 맞는 가격과 정확히 공명하지 않는, 안이한 제안이다. 대가는 크게 치르지만, 그만큼 현실이 나아지는데 보탬이 되는 움직임은 아니라는 말이다.
음 글과는 관련 없는 이야기지만…
혹시 이전에 맛의 객관성에 대해서 라면에 비유한 글을 쓴 적이 있으신지요?ㅠㅜ
다시 읽어보려고 찾는데 도통 보이지가 않네요.
내용은 제 기억이 맞다면 “대충대충 물 받고 시간 안 재고 끓인 라면과 물을 계량하고 자신이 아는 모든 노하우를 이용해 끓인 라면의 차이점을 느낄 수 없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혹시 기억이 나신다면 좀 알려 주실 수 있으신지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이전 글은 검색을 통해 찾아보곤 합니다.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접객 수준이 썩 빼어나지 않은, 한국어 하는 프랑스 청년이 웨이터로 일하는 걸 보니 아오야마 피에르에르메와의 미묘하고 유쾌하지 않은 접점이 느껴지던데요. 물론 그게 컨셉이라면 할 말 없지만 ‘ㅡ’
저는 쇼콜라쇼와 프렌치토스트를 먹었는데 재료는 훌륭하더라고요.
여담이지만 최근 일본 피에르에르메에서 가장 마음에 든 건 캔디봉봉 같은 비쥬얼의 바닐라제비꽃카시스무스 머랭이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글을 쓰기 전에 자문을 좀 구하려고 했습니다만 요즘 머릿속이 너무 비어서… 네, 재료는 훌륭합니다. 각각의 요소도 좋아요. 그걸 왜 저렇게 냈는가… 한편 속이 너무 빤히 보여서요. 심지어 커피도 좀 뜨겁게 나왔지만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