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의 이해(18)-재현의 음지와 양지
‘손님들이 ‘보링’한 딸기, 바닐라, 초콜릿’ 같은 것만 찾아요.’ 자칭 ‘미식가를 위한다’는 아이스크림 가게의 주인이 말했다. 홍대 어느 카페에 앉아 있다 우연히 들었다. 그래서 내놓는 게 깻잎, 막걸리, 올리브기름 아이스크림이다. 균형이 하나도 맞지 않는다. 잘 만든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훨씬 낫다. 물론 바닐라 맛도 판다. 주인의 철학을 담아 ‘지루한 바닐라,’ 이름답게 진짜로 지루하다. 채 반도 먹기 어려울 정도. 하지만 바닐라는 원래 지루하지 않다. 난(欄)과 식물의 열매로 약 2,000종의 향 화합물을 지녔다. 마다가스카르, 타히티, 멕시코 등 원산지 별로 향도 다르다. 깨닫기 어려운 일도 아니다. 가게 이름으로 따온 길의 도시 샌프란시스코라면 중심가 유니언 스퀘어의 ‘윌리엄 앤 소노마’ 같은 주방용품 매장에서 쉽게 시향할 수 있다. 따라서 바닐라는 죄가 없다. 섬세한 세계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과 그 손이 만드는 아이스크림이 지루할 뿐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오래 살았다는 주인이 무엇을 경험했는지 궁금하다.
서양음식 또는 고전의 재현에는 음지와 양지가 공존한다. 후자부터 살펴보자. 완벽한 재현은 성공을 보장한다. 그를 위한 여건도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다. 레퍼런스가 이미 풍성하게 존재한다. 시간과 노력을 충분히 들이면 답을 구할 수 있다. 책은 물론, 맛보며 배울 수 있는 레스토랑도 많다. ‘성공=단순한 이익 창출’이라 여긴다면 그것도 좇을 수 있다. 서울 파인 다이닝의 현주소를 보자. 프렌치 어니언 수프 하나만 잘해도 정통 프렌치 대접을 받는다. 셰프의 이상은 양파 수프 너머에 있을지 몰라도, 어쨌거나 손님은 찾아온다.
그럼 풍성한 레퍼런스 덕분에 재현이 쉬울까? 그럴 리가 없다. 전제조건이 완벽함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음지의 씨앗이 움튼다. 재현의 조건을 단순화시키는 무지, 원래 3차원인 대상을 2차원으로 뭉뚱그려서 인식하게 만드는 필터 때문이다. 다시 바닐라 아이스크림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나는 미식가가 아니지만 바닐라의 종류가 다양하고, 그에 따라 향의 표정도 다르다는 것쯤은 안다. 업계의 비밀도, 바닐라 산지 여행을 굳이 가서 얻어야 하는 정보도 아니다. 취재 여행에서 늘 들르는 매장에서 얻는 평범한 정보다. 따라서 ‘미식가를 위한 아이스크림’의 역할은 바닐라의 다양함을 소개하는 것이지, 지루함의 멍에를 씌우는 게 아니다. 그 섬세한 차이를 이해하고 같은 계란과 크림과 우유, 설탕의 베이스가 바닐라 빈도 아닌 추출액 한두 방울에 의해 사뭇 다른 표정을 띤다는 걸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양파 수프도 마찬가지다. 위에 얹어 녹이는 치즈는 대개 스위스의 그뤼에르지만 에멘탈러나 이탈리아의 폰티나, 프로볼로네도 쓸 수 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프로볼로네와 비슷한 임실의 복주머니 치즈는 가능성이 없을까? 지역 고속도로 휴게소에 파는데, 누가 맛은 본 적 있는지 모르겠다. 한편 국물에 한 숟갈 더하는 술은 또 어떤가. 코냑을 많이 쓰지만 그만큼 셰리도 쓴다. 그 둘 사이의 맛 차이는 어떨까? 레퍼런스가 풍성하다면, 그만큼 소화시켜 자신의 최적해를 만드는 노력도 풍성해야 한다. 객관식 찍기가 아닌 주관식, 논술을 위한 공부여야만 한다. ‘프렌치 어니언 스프:그뤼에르’라 덮어놓고 외우면 안 된다. 치즈의 고소함과 짭짤함, 감칠맛과 녹은 질감을 양파의 단맛, 육수의 쇠고기 맛이 자아내는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한편 풍성한 레퍼런스는 평가의 대상이 되었을 때 더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미 존재하며 비교 대상이 많으니 그만큼 기대가 높고 기준도 엄격하다. 한식을 생각해보라.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더 혹독하게 비교당한다. 된장찌개 하나 잘 끓여서 성공하기가 어렵다. 양식도 마찬가지다. 최대한 단순하게 가거나, 고전을 재현하기가 더 어렵다고들 말한다. 작은 실수 하나에 철저하게 난도질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은 실수라는 게 사실, 많은 레스토랑에서 만나는 질긴 홍합이나 오징어, 퍽퍽한 흰살 생선 같은 종류다. 달리 말해 숙련도 차이 등으로 이미 그렇게 실수가 밴 고전이 오르는 게 우리 파인 다이닝의 현실이다. 재현이 목표인 레스토랑으로는 지지난 달부터 다뤄온 미슐랭 별 따기가 그야말로 ‘별 따기’라 생각하는 이유다. 서양식의 기준으로 완벽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을뿐더러, 미슐랭 가이드의 근본과도 맞지 않다. 타이어 회사인 미슐랭이 가이드를 만든 건 그 자체로 여행의 목표가 되는 레스토랑[Destination Restaurant]을 찾아가라는 의도였다. 그래야 차를 몰고 닳는 타이어를 바꿔 낀다. 비단 미슐랭 별이 아니더라도, 훌륭한 레스토랑은 여전히 그 자체로 여행의 목표다. 지구 반대편에서 메뉴를 알 수 있는 인터넷 시대, 프렌치 어니언 수프는 트렁크를 꾸릴 만큼의 신비감을 자아내지 못한다. 당연히 미슐랭도 이를 알 것이다.
이웃 일본의 경우를 살펴보자. 미슐랭의 발행국 프랑스보다 별이 많은 나라라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뚜렷한 영역을 지닌 자국의 음식 문화가 별의 대상이니 시사하는 바가 있다. 2014년판을 기준으로 도쿄에서 별 셋 13군데 가운데 비 일식은 단 둘이다. 모두 프렌치, 그나마 하나는 프랑스의 거장 조엘 로뷔숑의 레스토랑이다. 한편 둘은 일식(스시, 복 등 포함)과 비일식(이탈리안 등 포함) 39:16, 하나는 108:67로 대략 2:1의 비율이다. 이 모두를 감안한다면 답을, 물론 주관식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자신의 양식이거나, 그들에게 낯선 한식이어야만 한다. 물론 별을 꼭 좇아야 한다는 전제 아래.
-월간 ‘젠틀맨’ 2014년 3월호
아, 저 “보링”하다는 말은 정말 충격이네요.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에 한표.
실제로 자신이 만드는 아이스크림도 만만치 않게 “보링”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