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켈러(프렌치 런드리) 프로파일
매주 토요일에는 기고했던 글이나 뒤져서 하나씩 올려볼까 생각 중이다. 이 글은 올 3월 토마스 켈러(프렌치 런드리 / 퍼 세)가 내한했을때 가졌던 인터뷰를 바탕으로 썼던 프로파일로 <탑클래스> 5월호에 실렸다. 사진은 작년 이맘때 욘트빌 갔다가 당연히 안에는 들어가보지 못하고 밖에서 찍은 사진. 프렌치 런드리도, 부숑도 못가고 꿩대신 닭대신 메추리라고 ‘애드 혹’에 들렀다. 물론 거기 음식도 훌륭했다. 이런 것도 모아서 책으로 내면 참 좋을텐데 내고 싶다는 곳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탑클래스 일도 그만 두었다. 음식 잘하는 셰프 한 20명 안팎으로 인터뷰+프로파일링해서 책으로 묶으면 그것도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될텐데.
1992년 봄, 삼십대의 끝자락에 선 셰프 토마스 켈러(Thomas Keller)는 동료 셰프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레스토랑 하나가 매물로 나왔으니 가서 확인해보라는 것. 장소는 욘트빌(Yountville), 와인 산지로 잘 알려진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의 작은 마을이었다. 레스토랑의 이름은 <프렌치 런드리(French Laundry)>, 프랑스식 증기 세탁소로 쓰였던 건물의 전적 덕택이었다. 인동덩굴이며 장미가 감싸고 있는 옛 석조건물은 프랑스의 레스토랑 주방을 거치며 수련하던 시절 접했던 시골집들처럼 낯익었으니, 그는 거기에서 오랜 시간 꿈꿔왔던 레스토랑의 가능성을 읽는다. 그러나 그에게는 레스토랑을 살 돈이 없었으니, 뜻을 같이하는 투자자를 찾는 데는 무려 19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돌아보면 제 인생 최고의 기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저는 커리어는 물론,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었거든요. 그 시점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미래를 열어나가지 못한다면 이후는 어떻게 될지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직업인(셰프)은 물론 한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해 생각했고, 거기에서 비롯된 책임감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그 책임감이 때때로 ‘실패할지도 모른다’라고 생각을 하게 될 때 나를 감내하도록 만들었고요. 감내할 줄 아는 건 비단 저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무지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레스토랑을 손에 넣기 위해 거쳐야만 했던 온갖 과정이나 그 안에 숨어 있던 어려움, 또 그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느낀 불안, 실패에 대한 염려 등…… 그 모든 것에 대해 사실 저는 무지했습니다. <프렌치 런드리>를 손에 넣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를 위해 응당 거쳐야만 했을 과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더라면 아마 도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어요. 말하자면 무지가 내 성공의 비결인 셈입니다.”
<프렌치 런드리> 이후의 성공으로 얻은 명성이 그러한 여지를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토마스 켈러는 대대로 주방을 물려가며 명맥을 이어나가는 유명 셰프나 음식에 유난히 까다로운 미식가 집안 출신이 아니다. 다만 그에게는 음식을 통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는 본능이 잠재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요식업을 포함한 접객업(hospitality) 종사자의 자질에 대해 ‘서비스 정신은 본래 내재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라고 밝힌다. 물론 그러한 자신을 알아보기 시작한 곳 또한 당연히 식당의 주방이다. 십대시절 어머니가 매니저로 일하던 식당에 설거지 담당으로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데, 이는 오늘날과 달리 조리학교의 존재가 미미하던 시절 많은 셰프들이 따랐던, 전통적인 도제제도의 첫걸음이기도 하다.
토마스 켈러를 말할 때 조금은 뻔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화제가 바로 프랑스의 여행 및 미식 가이드 ‘미슐랭(Michelin)’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바로 그 타이어 회사에서 발간하는 이 가이드는 별 세 개를 최고점으로 설정, 레스토랑을 평가한다. 전 세계를 통틀어 매년 백 군데 안팎의 레스토랑이 영예를 안는데, 토마스 켈러의 경우 <프렌치 런드리>는 물론 뉴욕 맨해튼의 또 다른 레스토랑인 <퍼 세(Per Se)>를 통해서도 매년 별 셋씩을 꼬박꼬박 지켜나가고 있다. 이는 미국인으로서 최초이면서도 유일한 경우로, 그의 요리가 시원(始原)인 유럽의 최고 수준과 동격이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미슐랭 별 셋의 쌍두마차를 포함 열한 군데의 레스토랑이며 베이커리를 굽어보는 토마스 켈러지만, 오늘날의 성공까지 이르는 길에서 겪은 실패는 그 성공을 꿈꾸기조차 어렵게 만들 정도로 혹독한 것이기도 했다. 프렌치 런드리를 처음 찾았을 때만 해도 레스토랑 매입은커녕 당장의 생활비를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호텔 레스토랑의 셰프로 고용되었지만 재료 공급업자 선정 등을 놓고 의견 충돌을 일으켜 일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간섭받지 않고 자신의 요리를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주방은 물론이거니와 레스토랑 전체의 경영마저도 꾸려나가는 ‘오너셰프(Owner/Chef)’만이 길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삼십대의 끝자락에서 꿈의 레스토랑을 찾아 우여곡절 끝에 오너셰프가 되어 펼치게 된 토마스 켈러의 요리 세계는 어떤 것일까? 사실 그저 ‘토마스 켈러의 요리’겠지만 굳이 스타일을 구분하자면, 오랜 전통을 지닌 프랑스 레스토랑의 주방 또한 거쳐 가며 장인, 또는 명장의 경지까지 다듬은 프랑스 요리의 기본기에 미국적인 감성을 접목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그 나름의 ‘스토리텔링’, 또는 재치를 곁들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프렌치 런드리의 클래식으로 자리 잡은 ‘굴과 진주(Oyster and Pearls)’는 ’굴이 진주를 만드니까‘라는 그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굴에 우리에게는 ’버블티‘의 재료로 친숙한 타피오카 “진주”를 접목한 요리다. ’우스개의‘ 라는 뜻의 표현 ’tongue-in-cheek’ 에서 실마리를 얻어 소의 볼살과 송아지의 혀를 짝지어준 요리도 비슷한 맥락에서 탄생, 테이블에 오른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콘을 손가락 크기만 하게 만들어 연어 타르트를 얹은 카나페는 레스토랑을 찾은 손님을 반기는 셰프의 한입선물, 즉 ‘아뮤즈 부시(Amuse-bouche)’로 프렌치 런드리에 유명세를 부여했다.
토마스 켈러가 ‘수확 체감의 법칙(The Law of Diminishing Returns)’의 신봉자인 덕분에, 모든 요리들은 서너입만에 먹을 수 있을 만큼 양이 적다. “더운 날씨에 맥주를 마시면 첫모금은 맛있지만 이후부터는 그 즐거움이 계속해서 줄어듭니다. 음식도 마찬가지에요. 적은 양을 내는 건 한두 가지 요리만으로 배를 채우는 대신 맛을 즐기고 이후에 나올 음식에 대한 호기심을 지켜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음식들은 시간차이를 두고 코스로 나오는데 처음 프렌치 런드리가 문을 열었을 때는 4, 5코스였던 것이 이제는 9코스로 고정되었고, 메뉴는 그날그날 수급되는 재료의 상태나 종류에 따라 매일 바뀐다. 이는 공급자들과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은 물론, 그 가치관을 바탕으로 가족과도 같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가능하다. 한편 고정된 음식이 없다는 건 ‘믿고 맡겨 준다면 최선만을 골라 손님에게 선사, 선택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셰프의 철학을 반영한 형식이다. ‘무엇을 먹을까?’라고 고민하는 대신, 손님은 그저 믿음을 가지고 식탁에 앉기만 하면 된다.
“저의 소임은 다음 세대가 저보다 더 나은 셰프가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들이 저보다 못하다면 면 사람들이 뭐라고 말할까요? 실패를 입에 담을게 뻔합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더 나은 환경이며 설비, 교육, 멘토링 등을 제공해야 합니다. 목표가 토마스 켈러 저 자신, 즉 개인이나 <프렌치 런드리>또는 <퍼 세>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지요. 이 직업 자체의 발전, 그것이 목표며 제가 남기고 싶은 발자취입니다.”
가치관의 공유, 이는 공급업자들과의 관계에만 국한된 사안이 아니다. 열 군데가 넘는 레스토랑과 베이커리가 모두 똑같은 최고의 수준을 언제나 유지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기도 하다. 그를 위해 토마스 켈러는 멘토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장학 프로그램과 같은 교육 시스템을 설립해 보다 체계적으로 자신의 레스토랑 주방에 발을 들인 인재의 가치를 극대화한다. 이렇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에게 이제 막 주방에 발을 들여놓거나 요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인내에요. 젊음은 때로 성급합니다. 앞으로 빨리 나아가고 싶어 하지요. 그게 오히려 발전을 저해합니다. 특히 같은 일을 계속해서 되풀이해야 하는 주방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 되풀이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돌아보면 젊은 시절, 손으로 음식을 직접 만들 때 가장 행복했습니다. 경력이 쌓일수록 그렇게 손으로 요리하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되풀이는 배움을 위한 과정이니 즐길 수 있었으면 합니다. 두 번째는 끈기입니다. ‘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자신을 믿어야 합니다. 실패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다만 노력을 멈추지 마세요.”
-<탑클래스> 2012년 5월호
# by bluexmas | 2012/10/27 13:52 | Taste | 트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