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가로의 출장

 안, 아니 못 버는 사람의 그것치고는 이해할 수 없게 바빴던 하루는 부모님 댁으로의 출장으로 마무리되었다. 어머니가 들으시는 수업 발표가 있는데, 급하게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신 발표용 파워포인트에 조카뻘 되는 다른 여학생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구조요청을 날리셔서 그걸 좀 봐 드리러 가야만 했다. 오늘따라 날씨는 왜 이 따위로 구질구질한지, 솔직히 밖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왔다가 또 나가 운동을 하고 돌아오니까 정말 밖에 한 발짝도 나가기 싫었지만 또 그렇다고 이런 일에 그렇게 할 수 있냐면 그것도 아니니까… 그럴 때에는 차라리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게 훨씬 낫다. 게다가 입장 바꿔서 내가 뭔가 해야 되는데 두 분의 도움이 필요했다면 날씨가 이 따위라도 마다할 분들도 아니고, 뭐 그런거다.

사실 인터넷 할 줄 아시고, 메일 쓸 줄 아시고, 또 문자도 날릴 줄 아는 어머니니까 파워포인트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아버지께서는 온갖 강의 같은 것들을 위해 독학으로 익혀 쓰셨는데, 가끔 나왔을 때 궁금한 걸 알려드렸고 요즘은 가까이에 있으니까 다른 일 때문에 집에 갈 때마다 궁금하게 생각하시는 걸 알려드린다. 옛날옛날, 파워 포인트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에 아버지가 강의를 나가시면 영사기를 위한 필름에 색색깔의 네임펜으로 글씨를 써서 자료를 만드시곤 했는데, 서예도 하셨겠다 손 글씨가 워낙 좋으신 아버지의 강의 자료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건 좀 섭섭한 현실이다.

나야 뭐 건축회사를 다녔지만 그건 위장이었고 본래 직업이 포토샵이나 파워포인트 따위를 이용한 발표 자료 따위 만드는 잡부였으니까 그런 자료는 때로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아니면 좀 과장을 보태 한 달도 만들었으니까 발가락으로도 원하시는 건 만들어 드릴 수 있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너무 쉬운 일을 하는 분위기를 풍기면 아 이렇게 쉬운거 왜 우리는 못하나 자존심 상하실 수도 있으니 그것도 좀 그렇고, 또 혹시라도 너무 말도 안 되게 자료를 만들어 놓으셨다고 해도 드러내놓고 웃지 않는게 좋고, 또 그냥 가져오시라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다 해드리겠다, 고 말씀드리는 것도 사실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건 또 나름 스스로 배우시려고 하는 욕구나 기회를 빼앗아가는 셈이 될 수도 있으니까.

저녁을 얻어 먹고 어머니의 자료 열 몇 장을 다시 만들어 드리는데 총 두 시간이 걸렸다. 내가 너무 내 의견을 내세우거나 어머니를 재촉하면 생각하고 계신 방향이 있어도 말씀을 안 하실 수 있기 때문에, 때로는 딱 중간을 걷는게 쉽지 않을때도 있다. 내가 뭐 그런 걸 좀 할 줄 알아서 온갖 기교를 부려 만들어드린다고 해도 그게 어머니 취향이 아니라서 마음에 안 드시면 의미가 없으니까. 또 심지어는 가르치는 교수가 만들었다는 파워포인트를 보았는데도 특별한게 없어서 힘을 빼고 간단하게 만들어 드렸다.  좀 더 화려하고 복잡하게 만들어야 아들보다도 훨씬 더 어린 여학생들에게 구리다고 핀잔 듣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텐데…. 어쨌든 출장은 사후 서비스나 끝마무리가 더 중요하니까 파워포인트 파일을 다 만들고, 같이 수업듣는 학생들과 어머니의 발표를 위한 유인물-잘 안 보이신다고 해서 한 쪽에 슬라이드 두 장씩 들어가도록 만들어 드렸다. 다른 학생들을 위한 건 네 장씩 들어가는데. 이거 좀 슬퍼해야 될 일인가?-을 다 만들어 드리고 학교에 가져가시라고 USB 메모리에까지 담아드리고 퇴근했다. 오랫만에 프로그램 열어놓고 키보드랑 마우스 쓰니까 기분이 새롭던데, 나 지옥과 같은 옛날 직장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Cad Monkey의 생활을?

 by bluexmas | 2009/05/12 00:07 | Life | 트랙백 | 덧글(6)

 Commented by Amelie at 2009/05/12 00:11 

배려심 깊은 따뜻한 아들이시군요!

저라면.. 엄청 귀찮아 하면서 ‘그냥 내가 할게’ 하곤 후다닥 해서 드렸을텐데..

어쩐지 부모님께 죄송하고 불효 자식이라 씁쓸하네요 ㅠㅜ

아버님의 강의 자료를 볼 수 없게 된건 저도 섭섭해요. (한번도 본적은 없지만)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5/12 00:35

히히 아니에요 저 개불효자에요 T_T;;; 그래서 그거 갈음하려고 막 열심히 귀 기울이며 하는 척 하는거죠. 제가 더 개불효자니까 Amelie님은 너무 걱정 마세요T_T;;;;

 Commented at 2009/05/12 01:0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5/12 11:00

네, 엄연한 출장이죠^^ 히히. 사실 걸어서 십 분도 채 안 걸리니까 가계에 무리를 드리고싶지는 않아서 닭죽 한 그릇으로 출장비를 갈음했어요. 그거면 됐죠 뭐.

 Commented by liesu at 2009/05/12 13:33 

아들노릇 잘 하셨네요. 🙂 부모님 뿌듯하셨겠어요. 저희 엄마도 엠피쓰리같은 기계류(?) 다룰 일 있으면, 제 동생 집에 내려오길 기다리거나, 주변 총각;;; 들 한테 물어보신다고 말씀하시는데, 마음이 좋지만은 않더라구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5/12 23:17

아아니에요, 저 개불효자에요-_-;;; 이런 글은 민망해서 못 올리겠다니까요, 흐흐… 저희 부모님도 엠피쓰리 재생기 몇 년 전에 사서 설치도 해 드리고 그랬는데 요즘은 어떻게 쓰시나 모르겠어요. 말씀해주신김에 한 번 여쭤봐야 겠네요. 알려주셔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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