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일기(7)-이력서

, 정말 내가 실직했다는 소문이 방방곡곡에 메아리치고 있나보다. 어제는 무려 108명의 손님이라는 기록적인 수치를! 언제나 내가 얘기하지만, 검색도 막아놓고 밸리에도 절대 안 올리는 이 자발적인 초 마이너 블로그에 60명만 와도 대박인데 거의 두 배나 되는 수가… 그것도 107도 109도 아닌 108이라니 뭔가 의미심장하지 않나? 이 실직상태 한 가지만으로도 108번뇌 모두를 합친 듯한 번뇌를 안겨주니까…

어쨌든, 오늘도 계속계속되는 실업일기. 이제 일주일도 안 썼는데, 빨리 그만 썼으면 좋겠어. 스스로 실직자라고 생각하니까 밥맛이 다 없다니까.

새벽 네 시까지 이력서를 붙들고 있었다. 어제 몇 군데에 자리가 났다고 메일 받은 데에 응답해 주기 위해서라도 이력서의 업데이트는 시급했다. 사실 이건 업데이트가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것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력서를 업데이트 안 했고, 지난 이력서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누군가는 이력서도 디자인하냐고 물어보던데, 이력서가 어떤 면에서는 포트폴리오보다 더 어렵다. 단 한 장에 경력을 간결하게 설명해줘야 하는 것은 물론, 약간의 개인취향도 들어가야만 하니까. 그냥 워드로 경력은 뭐뭐, 학교는 어디어디… 이런 식으로 문서를 만들어서는 들여다 보지도 않는다. 또 그렇다고 해서 나름 디자인을 한답시고 너무 많은 글꼴을 쓴다거나 하면 또 읽는데 산만하게 느껴지니까 그것도 자제해야만 하고… 나는 보통 arial을 즐겨 쓰니까 보통과 이탤릭, 그리고 그 두 가지의 굵은 글꼴을 적절히 섞어 통일감을 주면서도 또 단조롭게 보이지 않도록 만든다. 그래서 워드를 붙잡고 새벽 네 시까지 봐줄만하게 만들고, 어제 누군가가 귀띔해준 두 군데의 회사에 이력서를 보내고는 잠이 들었다.

이력서도 이력서지만, cover letter를 쓰는 것도 짜증난다. 남들처럼 똑같이 쓰지 않으면서도 정도를 벗어나지 않아야 하니까. 요즘은 메일로 쓰니까 좀 편해진 것도 있지만, 이력서나 cover letter 모두 뽑고, 오탈자 확인하고,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또 뽑고, 또 보내는 회사마다 조금씩 다르게 쓰면서 각 담당자들 이름이 틀리지 않게…  뭐 이런 모든 자질구레한 것들을 일일이 확인하려면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게 된다. 결국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 이력서 보낸 회사 한 군데의 이름을 메일에 잘못 썼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 스트레스.

어쨌든 이력서를 완성시켜놓고 오늘 하루만은 조금 느긋하게 즐기는 실업자가 되고 싶었는데, 늦게까지 자다가 눈을 떠서 메일을 확인하니 전 회사에서 보내주는 취업정보 메일이 우수수 쏟아져서 졸지에 마음이 급해져버렸다. 웃기는 건, 거의 전체메일 식으로 메일을 돌려서 관심이 없어도 누가 회사를 나가게 되었는지 다 알게 되었다는 것… 솔직히 나도 회사를 나온 입장이니까, 호기심이 있더라도 다른 누가 나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지는 않다. 내가 남의 호기심 먹기가 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나도 남을 내 호기심의 먹이로 삼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그 메일에서 본 명단은 좀 충격적이었다, 사실…

다시 취업정보로 돌아와서, 사람을 뽑는다는 회사 가운데 하나는 어떤 어떤 이유로 나에게 안면이 좀 있는 회사라서, 좀 느긋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급하게 메일을 써 이력서를 붙여 날리고, 다른 인연으로 그 회사에 함께 인연이 있는 분께도 메일을 날려 도움을 청했다. 그러고 나니 해가 지기 전에 달리기를 해야 될 시간… 아직 학교 체육관에 회원권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번 주만은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시내에 내려가지 않고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기 때문에, 바람이 쌩쌩 부는 날씨에 밖에서 달리기를 했다.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장갑을 꼈는데도 손이 너무 시려워서, 10킬로미터 가운데 7킬로미터만을 채우고 집에 들어와야만 했다.

내일과 모레에는 전 회사에서 돈을 내주는 무슨 구직관련 세미나-나를 어떻게 더 잘 팔아먹을 것인가?-가 있을 예정인데, 난 물론 가지 않기로 했다. 거기에서 그 비슷한 운명에 처한 사람들 보기도 싫고,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해야 될 것 같아서. 늦잠이나 자야지.

어쨌든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 하고, 그 결과는 결과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라는 생각을 했다. 결과가 원하는 대로 주어지지 않더라도, 이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내 삶에서 이게 처음이 아닐 것이다. 뭐든 배워야 한다. 이렇게 해서 빨리 새 직장을 찾으면 또 찾는대로, 아니면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해서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또 다른 길을 찾더라도 또 그 나름대로.

 by bluexmas | 2009/02/05 09:55 | Life | 트랙백 | 덧글(3)

 Commented by 나녹 at 2009/02/05 12:44 

복잡할 땐 달리기가 최고죠; 저도 내일 오전에 Y 다녀올듯

 Commented at 2009/02/05 15:5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09/02/06 15:18 

나녹님: 너무 추워서 달리기하다가 죽을뻔 했어요. 직업도 없는데 달리기하다가 죽으면 어째요? 직업 탐색 잘 되셨으면…

비공개: 아, 요즘도 들르고 있는지 몰랐다. 사람들 대부분 와서 얼마 들르다가는 안 오고 그러니까…

아무 얘기 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내가 괜찮으니까.

잘 지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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